뻘소리 주의
시라토리자와 멤버 이름 언급 주의
오타 주의
하야시라이스
더위가 한풀 꺾인 어느 휴일. 오이카와와 함께 집 대청소를 하며 자신의 방을 정리 하던 우시지마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이곳으로 이사를 할 때 우시지마는 일 때문에 도쿄로 먼저 와있다. 그래서 짐 정리 마무리를 집에 부탁했는데 그때 누군가가 챙겨 넣은 듯했다. 책 제목은 '시라토리자와의 스타들'. 고등학생 수준의 조금 유치한 제목의 책은 우시지마가 3학년 가을, 학교 축제 때 학생회에서 비용마련이라는 명목으로 정식으로 학교에 허가를 받고 만들어진 발행물이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시라토리자와의 유명한 운동부 선수들의 프로필 집으로 사진 자체는 졸업한 선배들과 지역신문 기자들의 도움을 받아 꽤나 그럴싸하게 찍힌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덕분에 학교 축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세미의 말을 빌면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책이었다. 참가는 자유였지만 이런 소란스러운 행사를 좋아하는 텐도에게 붙잡혀 시라토리자와 배구부 레귤러 멤버들은 전원 사진이 찍혔다. 이런 책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없는 우시지마도 연습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었기 때문에 거부하지 않았다. 책에는 배구부 뿐만이 아니라 야구부, 축구부, 궁도부, 검도부, 승마부, 요트부 등 주요 부원들의 경기, 연습장면, 그리고 프로필이 실렸다.
거기에 참여한 학생들에겐 전원 책이 한 권씩 주어졌고 우시지마는 자신에겐 그다지 쓸모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버리기도 곤란한 그것을 책장에 꽂아둔 채 방치하고 있었다. 책의 내용은 책을 받은 날 부실에서 다들 돌려보는 걸 원치 않아도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딱히 다시 펼쳐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 책의 존재를 다시 인식하자 문득 옛날 생각이 나 우시지마는 그것을 꺼내 펼쳤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배구부가 실린 목차로 페이지를 넘겼다.
팀원들이 전부 서서 찍은 단체사진과 간략한 배구부에 대한 소개가 실린 옆 페이지에는 바로 주장인 우시지마의 사진과 프로필이 있었다. 경기 중에 찍힌 듯한 사진을 그땐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아래에 인터하이 결승전이라는 글자와 날짜, 그리고 사진기자의 이름과 이메일이 적혀 있었다.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서브를 하는 그의 상반신 사진이었다. 그 옆에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는 자신의 얼굴이 있었다. 휘리릭 페이지를 넘기자 대부분 부원들의 비슷한 사진들이 보였다. 이게 어디가 그렇게 웃돈 주고 구할 물건인지 지금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책을 덮을 때 열린 문으로 오이카와가 들어왔다.
"우시와카쨩 이거 어디다 둬? 뭐해?"
"아니."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손에 든 책을 낚아채 봐도 되냐고 물었다. 별 중요한 것도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자 오이카와는 곧장 책을 바로 쥐었다.
"아아, 이게 그 전설의 시라토리자와의 스타들. 우시와카쨩 가지고 있었어?"
"주더군."
"하긴 사진 찍어갔으니 줬나 보내."
이 책이 나오고 보름쯤 지났을 때 텐도가 다른 학교에서도 인기 끈다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오이카와가 알고 있는 걸 보니 그 다른 학교에 아오바죠사이도 들어가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들고 들어온 우시지마가 구입한 잡지를 보관할 것과 버릴 것으로 나누었다.
"맞다. 우시와카쨩 하야시라이스 좋아한댔지."
"음?"
우시지마가 고개를 들자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사진 옆에 쓰여진 항목 하나를 가리켰다. 오이카와는 몇 년 전 이 책을 봤을 때 우시지마가 좋아하는 음식이 하야시라이스여서 안 어울려! 라고, 책을 돌려보던 아오바죠사이 배구부원들과 함께 외쳤던 것이 기억났다. 곧 잊었고 우시지마와 사귀고 난 뒤 우시지마가 한 번도 하야시라이스를 언급한 적이 없어서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다 책자를 다시 보자 새삼 생각이 났다.
"생각보다 애 입맛이라고 생각했지."
"당시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무의식인 거야 말로 진심인 거 아냐?"
"글쎄."
"그럼 우시와카쨩은 뭐가 제일 좋아?"
생각해보면 한 번도 질문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오이카와가 물었다. 우시지마는 식성이 무던했고 생긴 모습답게 지나치게 달거나 지나치게 느끼한 것만 아니면 군소리 않고 먹었다. 가리는 건 오이카와 쪽이 더 많았기 때문에 메뉴 결정권은 늘 오이카와가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생각나는 건 없군."
"역시 하야시라이스?"
"글쎄."
"좋아하긴 하는 거 아냐?"
"싫어하진 않는다. 가끔 생각나기도 하고."
"그러면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그런가."
"응."
오이카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페이지를 앞뒤로 넘겨보았다. 그리고 금세 흥미가 식은 듯 특별히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게 아닌 책자를 우시지마에게 돌려주었다.
"이거 보니까 하야시라이스 먹고 싶어졌어. 저녁에 해먹을까?"
"네가?"
"왜? 못 미더워?"
"아니다. 기대하지."
"맡겨두라구. 대신 설거지는 우시와카쨩이 하는 거야?"
"알았다."
우시지마도 오이카와도 요리에는 썩 재능이 없었다. 그래도 하야시라이스라면 카레 정도의 난이도이니 크게 실패할 일도 없을 듯해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청소를 마무리 하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매대에 전시된 몇 종류의 하야시라이스 가루 중에서 어릴 때부터 봐 익숙한 고형분 하나를 카트에 집어넣고 야채코너에서 양파와 당근과 감자를 집어들었다. 정육코너에서 하이라이스를 만들 거라고 하자 잘라주는 쇠고기를 조금 많이 가져왔다. 오이카와의 간식을 비롯한 집에 부족한 생필품 등을 고른 후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이카와가 하야시라이스를 만드느라 고군분투 하는 동안 우시지마는 마트에서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가벼운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도와주겠다고 해도 오이카와가 자기가 하겠다고 한 탓이었다. 한동안 덤벨에 집중하고 있자니 곧 익숙한 냄새가 났다. 우시지마는 손에 든 것을 놓고 거실 쇼파에 앉아 주방에 선 오이카와의 뒷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때, 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질문에 하야시라이스를 떠올렸는지 기억이 났다.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그 지역 유지인 우시지마가의 집안 어른들은 크고 작은 일들로 늘 바빴다. 우시지마의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일과 사교모임으로, 어머니 또한 여러 모임으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짧았다. 어릴 때부터 그게 당연했고 집에는 형들도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봐주는 고용인들도 몇 사람이나 있어 우시지마는 부모의 부재를 딱히 슬퍼한 적은 없었다.
우시지마가 6살 생일을 막 지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무언가를 사 들고 집으로 왔다. "와카토시가 좋아할 만한 걸 알아왔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라고 말한 어머니는 주방에서 앞치마를 입었다. 우시지마는 처음 보는 어머니의 앞치마 차림이 신기해 식탁 앞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고소한 버터의 냄새와 야채 볶는 냄새가 났다. 잠시 후엔 익숙한 하야시라이스의 냄새가 피어 올랐다. 유치원 급식에서도 가끔 나오는 하야시라이스의 익숙한 냄새지만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이는 주방에서 나는 냄새는 어딘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어린 막내아들 전용으로 특별히 제작한 -당시엔 몰랐지만- 접시에 하얀 쌀밥에 짙은 갈색 소스를 끼얹은 하야시라이스를 담아 우시지마 앞에 내려놓았다. 어머니가 요리를 하는 걸 알았는지 학교에서 돌아온 바로 위 형도 주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어머니는 조금 더 큰 접시에 하야시라이스를 가득 담아주었다. 형이 입안 가득 밥을 떠넣는 것을 보며 우시지마도 그 모습을 따라 했다. 어머니가 웃으며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먹으라는 것이 아니었나 유추할 뿐이었다.
그 일이 어머니와의 아주 특별한 기억은 아니기 때문에 소중하게 간직한다든가 하는 감상적인 감정은 없었다. 단지 그 이후로 외식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메뉴판에 하야시라이스가 보이면 가끔 선택했을 뿐이다. 그때마다 그저 평범한 맛이라고 생각했고 금세 잊었다. 왜 그걸 선택했는지는 왜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질문에 답했는지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감흥을 남기지 않고 우시지마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오이카와의 뒷모습과 함께 주방을 가득 채운 냄새에 우시지마는 왜 자신이 그 질문에 하야시라이스라고 답했는지 어렴풋이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우시지마는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그가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고 베니랜드 노래를 중얼거리는 오이카와의 허리를 우시지마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귀찮게." 라고 말을 했지만 오이카와는 그를 뿌리치진 않았다. 어깨에 턱을 얹고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 속 내용물에 시선을 주었다.
"배고파?"
"조금."
"다 됐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오이카와."
"응?"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돌아보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오이카와."
"왜."
"오이카와."
"왜 자꾸 불러!"
그제야 오이카와는 버럭 화를 내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그런 오이카와의 입술에 우시지마의 입술이 닿았다.
"아, 진짜!"
오이카와는 언성을 높이면서도 우시지마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입 맞춰 주었다.
"좀 기다리라구."
"알았다."
"떨어져."
"그건 싫군."
"그럼 떨어져서 수저라도 놔. 다 됐어."
"...알겠다."
우시지마는 아쉬움을 접고 오이카와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식탁에 수저를 놓고 냉장고를 열어 오이카와의 어머니가 보내준 절임류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맥주도." 라는 소리에 맥주캔 두 개를 꺼냈다. 그동안 오이카와는 밥과 소스를 큰 그릇이 가득 차도록 담았다.
자리에 앉아 "잘 먹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 스푼을 들었다. 일정하지 않게 대충 썬 듯한 감자와 당근 위로 쇠고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먹고 더 먹어."
"충분하다."
"오이카와씨가 해준 거잖아. 많이 먹으란 말야."
"그러지."
결국 우시지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 없이 스푼을 입으로 날랐다. 특별할 것 없는, 인스턴트 고형분을 사용한 평범한 하야시라이스였다. 그래도 아주 맛있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의 우시지마는 이 평범한 음식이 왜 맛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다음에도 누군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야시라이스'라고 답할 것 같았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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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뻘하게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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