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e to the Gale - 광풍의 송가
발간일 : 2016년 10월 02일 우시오이 온리 'LOVE & WAR 2'
커플링 : 우시지마X오이카와 (R-19)
※ 책 사양
신국판 인쇄본 150 페이지
※ 가격
12,000원
※ 주의사항
● 성인이신 분들에게만 판매합니다.
● 천사 우시지마 X 마왕 오이카와 X 황제 와카토시 (공수공) 입니다.
● 우시오이지만 우시지마가 천사와 황제로 두명입니다.
이런 이야기에 예민하신 분께서는 구입을 삼가주세요.
● 정사장면 중 셋이 같이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이카와에게 한번에... 하는 것도요..)
※ 샘플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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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e to the Gale
- 광풍의 송가
태초는 암흑이었다.
“있으라.”
신의 음성과 함께 세상이 열렸다.
어둠은 깊고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빛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뻗어 나갔다. 빛과 어둠이 충돌한 공간에 우주가 만들어졌다. 빛과 어둠이 결합해 별이 생성되고 그 잔해가 별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억만년의 시간이 흘러 빛과 어둠이 있는 모든 곳에 세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생명이 탄생하고도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후 신의 형상을 닮은 두 번째 존재가 세상에 나타났다. 인간은 그들이 밟고 선 땅에 가장 나중에 태어나 가장 짧은 시간에 그곳의 지배자가 되었다. 탐욕은 인간만의 것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흘린 피로 인간은 역사를 썼다. 하나의 대륙은 인간의 욕심을 대변하는 힘의 크기로 갈가리 나뉘고 그 땅 위에 지배자의 관을 쓴 이들이 나타났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왕국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륙은 하나의 제국을 탄생시켰다. 우시지마 왕가의 국왕 와카토시. 대신관이 그의 발에 입맞춤으로 왕은 신권을 부여받아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는 신의 모든 피조물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고 그의 탄생에 신의 축복이 있었으므로 그 누구나 황제의 머리에 자리한 황금관에 경의를 표했다.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는 마치 태양을 등진 듯 보였다. 천사는 고귀한 여인에게 이르러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기를 “그대에게 깃들 것이니 그 이름은 신을 대변할지어다.”라고 했다. 왕비는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천사의 말을 따를 것을 맹세하고 백일 간 몸을 정결히 한 후 그로부터 삼백일 뒤 사내아이를 낳았다. 하얀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 요람에 내려앉더니 날개를 넓게 펼치고 머리를 숙여 아이에게 절했다. 그 아이가 왕으로 자라 황제가 되어 제국의 이름을 시라토리자와라 칭했다.
제국의 초대 황제 이후 칠백여 년을 걸쳐 내려오며 그의 후손 중 몇 명이 와카토시의 이름을 받았다. 그 이름 뒤에는 언제나 빛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있었다. 천사는 대륙에 큰 위험이 닥치기 전에 나타나 제국에 신의 힘을 내려주었다. 그 힘이 임하여 잉태된 아이는 와카토시라 불리었고 그 이름을 짊어진 황제는 언제나 대륙을 위기에서 구하고 가장 강대한 황제로 칭송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와카토시 황제 이후 이백여 년, 연호가 열두 번 바뀔 동안 어떤 황제도 와카토시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강대한 황제의 이름은 그대로 전설이 되는 듯했다.
여인은 제 모습이 부끄러워 가슴 앞으로 내려온 긴 머리카락과 함께 누런 베옷의 앞섶을 움켜쥐었다. 어딜 둘러봐도 찬란한 황금빛 세상에서 생전 처음 거친 천 조각을 몸에 걸친 저가 가장 초라하게 느껴졌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공간,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전부 금빛으로 일렁이는 그곳을 여인은 정처 없이 걸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성스러운 소리는 신전을 울리는 장엄한 노랫소리보다 아름답고 여인의 지아비이자 제국 황제의 존재보다 무겁고 두려웠다. 여인은 어느새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서서히 드리워지는 찬란한 빛의 일렁임에 여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인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여인의 머리 위에서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여인은 손바닥을 바닥에 대었다. 하염없이 솟아나는 환희에 찬 눈물을 참지 못하고 온몸을 바닥에 엎드리는 것으로 신을 향한 찬미와 복종을 대신했다.
그 순간 순식간에 주변에 어두워졌다. 여인이 눈을 뜨자 황금빛의 찬란한 공간 대신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여인은 한순간도 참을 수 없어 그대로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맨발로 응접실로 난 문을 활짝 열었다. 놀란 시녀들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벽 한쪽에 마련된 제단 앞으로 뛰어갔다. 이미 촛불이 꺼진 그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자 세 폭의 제단화에 그려진 아름다운 천사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황비는 양손을 들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그녀가 아는 모든 기도문과 송가로 벅찬 기쁨을 표했다.
그녀는 해가 떠오를 때까지 제단 앞에서 기도했다. 떠오르는 태양으로부터 제단까지 드리워지는 빛을 받으며 황비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제단화에 그려진 천사의 날개가 새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며 신을 부르고 감사 기도를 올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수도원으로 들어가겠사옵니다. 폐하. 그곳에서 몸을 정결히 하고 신의 말씀을 기다릴 것이옵니다. 신첩이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는 날, 신첩은 태에 와카토시를 잉태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황비…. 꿈이라는 건 본래….”
“의심하시는 것이옵니까?”
“그야….”
선황의 선황이라거나 그 선황의 선황도 아니고 무려 이백여 년 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와카토시의 이름을 지금의 황제는 잘 만들어진 전설이라고 생각했다. 황가와 신전의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위대한 황제의 업적이 신의 힘으로 비롯되었다고 선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을 극복해 위엄을 더 공고히 한 황제의 이름 중에 와카토시가 많은 건 사실이었으나 황제는 그 이름이 쇠락하는 황권을 다시 일으키고 싶어 하는 황가의 바람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이른 아침부터 황제를 만나러 온 황비는 신의 대리인, 천사의 계시를 들먹이며 자신이 위대한 황제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아들이 아버지인 자신보다 위대한 황제라는 말이라 탐탁지 않을 지경인데 황비는 전설처럼 백일 간 몸을 정결히 하는 의식을 행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설이 사실로 이루어지면 그날부터 삼백일. 황비는 홀몸으로 잉태하게 된다. 황제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한낱 꿈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황비가 못마땅했다.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황비가 오래 짐의 곁을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는군요.”
“오, 위대하신 폐하. 폐하께서 그 아름다운 말씀을 들으셨다면 신첩에게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수도원으로 가라고 명하셨을 것이옵니다. 모든 것이 경전에 쓰인 그대로였사옵니다. 천사의 새하얀 날개는 신의 말씀을 전부 품고 있었사옵니다. 그 날개를 감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신의 뜻을 알 수 있었으나 천사께선 친히 음성으로 신첩에게 이르셨사옵니다.”
감격에 겨운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황제는 혀를 차며 이 일을 어떻게 무마시켜야 할지 고민했다. 벌써 황궁에 소속된 신관들이 입을 모아 신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고 황비의 모국 출신 귀족들 역시 같은 소리를 앵무새처럼 재창했다. 황제는 생각해 보겠다고 자리를 파하였으나 황비는 포기하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황제의 얼굴을 보면 그 소리를 하니 그는 더 견디기가 어려웠다.
결국, 황제는 황비를 수도원으로 보내는 대신 황궁 안쪽에 자리한 작은 별궁에 기거하도록 했다. 황비는 황제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날로 당장 별궁으로 들어갔다. 별궁 문은 굳게 닫혔고 하루가 멀다 하게 연회가 열리던 황궁은 순식간에 고요 속에 잠들었다. 귀족들은 자택으로 돌아가 스스로 근신하며, 수도의 모든 신전은 밤에도 불을 밝히며 황비의 태에 깃들 ‘와카토시’의 안녕을 기원했다.
황제는 굳은 얼굴로 황궁의 정중앙에 걸린 시라토리자와 제국의 초대 황제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이야기가 다시 황제의 귓가에 맴돌았다. 혼란스러운 대륙에 강림한 신의 은총. 인간이 그들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때,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외부의 위험이 닥쳤을 때 신은 그가 기꺼이 그의 형상을 본떠 창조한 인간을 향한 한없는 자애로 인간이 시련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출 자를 보내준다고.
황제는 주먹을 움켜쥔 채 제 선조를 올려다보았다. 군주라기보단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한 엄격한 얼굴은 황궁에 걸린 황제의 초상화 중 ‘와카토시’라고 이름 붙은 모든 초상화의 얼굴과 같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의 기적에 감읍하여 경외하기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황제 역시 제가 신에게 선택받은 제국의 적장자임에 긍지를 가졌다. 그 어떤 마법으로도 풀 수 없는 위대한 신의 은혜로 제 자손이 ‘와카토시’일 수 있기를 꿈꿨다.
하지만 점점 황제의 자리에 가까워질수록 ‘와카토시’의 선황이라는 위치가 얼마나 괴로운 자리인지 깨닫게 되었다. 제국의 위기를 눈으로 봐야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해 결국 신의 힘을 빌어야 한다. 후대에는 무능한 황제로 기록될 것이며 아들이 제 황위를 찬탈하는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와카토시’가 있었기에 대 시라토리자와 제국이 대륙을 지배하지만 ‘와카토시’가 태어난다는 것은 제국이 위험에 빠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황제는 눈꺼풀을 깜박이지 않아 어느새 핏줄이 터진 눈으로 시라토리자와의 첫 ‘와카토시’를 노려보았다. 제 아들이 ‘와카토시’라면 저로 인해 태어나야 했다. 제 제국이고 그 제국을 이어받을 다음 대의 황제는 당연히 자신의 핏줄이어야 했다.
황제는 무작정 별궁을 향했다. 밤의 깊은 어둠, 달빛의 찬란함, 별의 아름다움 같은 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확고한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자신의 비가 기거한 곳으로 걸었다. 오늘이 그녀가 꿈을 꾼 지 백일째 되는 날이라는 사실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황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별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황제이니 그가 이 제국 안에서 가지 못할 곳은 아무 대도 없었다. 하지만 황비가 기거하는 방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황제는 천국의 문을 수호하는 사자 머리의 괴수 모양으로 만들어진 문고리를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금칠한 쇳덩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트렸다.
“비! 문을 여시오! 비!”
“돌아가시옵소서. 폐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것입니까! 짐이 비의 얼굴을 보겠다는 게 그리 큰 잘못이오?!”
“송구하옵니다. 이것이 다 대의를 위해….”
“대의라니! 뭐가 대의란 말입니까!”
“폐하, 이러지 마시옵소서. 신첩은 분명 그분의 말씀을 들었사옵니다. 이 제국과 폐하를 위해, 분명 와카토시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누가 믿는단 말입니까! 당장 문 열어요! 여봐라! 도끼를 가져와라!”
“폐하…. 통촉하시옵소서.”
힘주어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부술 도끼를 가져오라 외쳤으나 그의 주변에 선 이들 중 누구 하나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뭣들 하느냐! 당장 가져와!”
“황비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하셨사옵니다.”
“지금 비의 말이 짐의 명령보다 더 중하다는 것이냐!”
“대신관께서도 서신을 보내셨사옵니다. 태가 깃들 때까지 사내라면 그 누구도 이 방문을 넘게 해선 안 된다 하셨사옵니까. 이곳의 경비를 강화하고 마법사들을 불러 결계를 세우신 것도 폐하가 아니옵니까.”
“시끄럽다! 당장 가져와!”
백일. 황제는 그동안 사내와 정을 통하지 않고 황비가 수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럴싸하게 지어낸 이야기로 백일 중 여러 날을 자신이 황비와 밤을 보내 잉태하면 그것이 바로 전설과 같아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운신할 수 있는 범위 내에 황비를 머물게 했고 황비가 다른 사내를 만날 일이 없도록 경비를 강화했으며 정말로 그 누구도 창을 열고 침범할 수 없도록 황비의 방 외벽에 결계를 치고 그녀의 행보를 감시했다. 마법의 결계 안에는 특별히 다시 마법의 징표를 몸에 그린 이들만 출입할 수 있었고 그렇게 출입이 가능한 이는 황비의 시녀들 몇 명뿐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의중을 파악한 한 마법사가 황제의 몸에도 은밀히 그 징표를 그려주었다. 그러니 황제는 충분히 이 방문을 열고 황비를 만날 수 있었으나 물리적으로 걸어 잠근 문을 통과할 수는 없었다.
“어서 문을 열란 말이다!”
황제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남자도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는데 만약 이대로 황비가 회임한다면 그건 황제의 치욕이었다. 모두가 이번에 황비의 뱃속에 깃들 아이를 ‘와카토시’라고 믿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이를 제 후계자로 길러야 했다. 황금의 관과 왕좌를, 불멸의 제국을 제 아들이 아닌 놈에게 빼앗겨야 한다. 황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드시 황비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게 하여야 했다. 차마 황제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이들 앞에서 황제는 발을 들어 문을 걷어찼다. 굳게 잠긴 문은 그 발길질에 요동치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열어! 열란 말이다! 문을 열어라!”
황제는 이를 드러낸 사자 머리에 걸린 문고리를 다시 붙잡았다. 문 안에선 안된다고 외치는 황비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울려 퍼졌으나 황제는 문고리의 금칠이 다 벗겨지도록 손에 잡은 것을 세차게 흔들었다.
“으아악!!”
“폐하!”
갑자기 손에 통증이 달려 황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이 붙잡고 있던 문고리를 보고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금칠한 고리가 불에 달군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사자의 잇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두 눈은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붉게 일렁였다. 발을 디딘 바닥까지 진동시킬 듯한 소리가 침입자에게 경고하듯 위협적으로 들끓었다.
“무슨….”
그 사명을 다 하기 위해 붉게 변한 눈동자를 더더욱 새빨갛게 불태우며 침입자를 노려보는 천국을 수호하는 사자 머리를 한 괴수의 형상을 보며 황제는 눈을 부릅떴다.
“폐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신을 노엽게 하지 마시옵소서.”
황제를 제외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바닥에 엎드렸다. 그들은 혹여 황제의 섣부른 행동이 신의 노여움을 사 신이 약속한 ‘와카토시’를 내려주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기도문을 읊기에 바빴다.
황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문고리를 잡았던 부분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황제는 통증으로 인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손과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상태로 돌아간 문고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며 엎드린 이들 중 하나가 황제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어의를 불러오라 외치자 다들 몸을 일으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는 어의를 불러오겠다는 시녀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별궁을 나갔다. 본궁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자신의 침소로 들어가자 언제 기별을 받았는지 어의가 곧장 뒤따라 들어왔다. 신관과 마법사도 함께였다. 황제는 한숨을 짜증스러움을 숨기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착석했다. 그들이 조심스레 황제의 상처를 살폈으나 그 상처는 약으로도 마법으로도 신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 황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를 치료하기 위해 온 이들은 말을 아낀 채 깊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황제는 그들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황제의 경솔한 행동을 지탄하고 싶어 한다는 걸 뻔히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그런 황당한 미신을 믿는다는 걸 황제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물지 않는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현실이었고 그것은 정말로 신의 경고처럼 보였다. 황제는 고통을 곱씹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비는 정말로 회임을 했고 그로부터 열 달이 지난 뒤 사내아이를 낳았다. 열 달 내내 끊임없이 짓무르던 황제의 손에 난 상처도 그때부터 아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흔이 낙인처럼 붉게 자리 잡았다. 황제는 그 상처와 ‘와카토시’를 번갈아 바라보곤 했다. 여느 평범한 갓난아이와 다를 바 없는 이 아이가 세상을 구할 존재라는 걸 아무리 봐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 아이가 ‘와카토시’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관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달려와 아이의 이마에 입 맞추며 축복했다. ‘와카토시’를 만나기 위한 귀족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어딜 가도 그 이야기뿐이었다. 마치 이제 막 태어난 그 아이가 이미 제국의 황제인 듯했다.
황제는 와카토시가 세상을 구하기는커녕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신의 축복이 아닌 악마의 계략인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독 늘어나는 마계의 존재들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몇 년 전부터 마법사들은 마계와 연결된 통로의 일그러짐을 경고했다.
뚜렷한 형태를 가지지 않은 그곳은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공간이 일그러지고 호기심에 그곳을 들여다본 자들이 마계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마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마족이라고 부르는 그것들은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흉측한 모습으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악취를 풍기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마족이 발로 밟은 곳은 독을 뿌린 듯 식물이 타들어 갔다. 그 존재가 근처에 있으면 동물들은 멀리 도망을 갔고 마족이 물에 들어가면 그 호수에 있던 물고기들이 죽어 떠올랐다. 우리에 갇힌 가축이나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었다. 때때로 인간처럼 두 발로 걷는 형체를 가진 것들이 사람을 겁탈하고 죽이기도 했다. 마족이 인간계로 넘어오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한 번 넘어오면 무척 피해가 컸다.
그런데 마계와 연결된 공간의 일그러짐이 자주 발견되면서 그만큼 이쪽으로 넘어오는 마족의 수도 늘어났다. 마법사들을 그 어느 때보다 마족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황제에게 이 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황제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마법 연구는 마계와 이어진 통로와 그 문이 되는 공간의 일그러짐을 통제하고 마족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다루었다. 황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에 결계를 만들고 군대에 함께 편성되어 마족을 사살하는 것도 마법사들의 일이었다. 인간이 만든 쇠붙이로 된 무기만으로 마족을 사살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 무기에 마법을 걸어 살상력을 높이고 방어책을 구축했다.
그래도 마족에게 가장 확실하게 손상 줄 수 있는 건 신력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선천적으로 신력을 타고나 신전에서 고된 수련을 통해 신력을 운용할 수 있고 그것을 공격력으로 쓸 수 있는 신관은 많지 않았다. 신의 자애를 제일의 덕목으로 삼는 신전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위험한 마계의 생명체라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신이 만드신 것이므로 평등하게 자애로워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어서였다. 신력을 사용해 타 존재를 공격하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에 규율을 어긴 자는 파문되어 추방당했다. 애초에 방어와 치유를 위한 운용방법만을 주로 교육하니 생명의 위기를 느껴 무의식중에 공격을 가하거나 호기심이 앞서 혼자 방법을 알아내 시험해보는 신관이 아니라면 신력을 사용해 공격한다는 발상 자체를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마법사들은 저들끼리 모여 신전의 방침을 비웃기 일쑤였다.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사용하지 않는 건 낭비 그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자연의 힘을 끌어모아 그 힘이 미치는 것을 변형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 마법은 마법사의 능력에 따라 언어, 문자, 기호, 물건이나 정신력 등 다양한 방법을 매개체로 물체를 변형시키거나 힘을 증폭시키고 지능을 가진 존재의 정신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러니 마족에게 가장 효과적인 신력이 그들에게 있다면 마법사들은 지체없이 그 힘을 가장 강력한 크기로 키워 마족을 처치하는 데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에 존재하는 힘과 신력은 근본적으로 달랐고 수련하는 방법도 달랐다. 신력과 마법사의 소질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어도 결국 한쪽을 택하기 때문에 마법사들이 신력을 사용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신관들은 인간의 권력에 빌붙어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마법사를 탐탁지 않아 했고 마법사들은 힘이 있는 데도 사용하지 않는 신관들을 점잔 떤다고 비웃었다.
마족을 처단하는 데 신력의 사용을 기대할 수 있는 건 신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자가 검을 사용하는 경우였다. 이를 위해 일부러 귀족 자제 중 신력을 가진 이들은 신전에서 엄격한 신관 교육을 받고 나와 기사 훈련을 받는 식으로 키워졌다. 신력을 운용할 수 있는 기사는 좋은 대우를 받고 명예롭게 여겨졌으나 살상에 대한 거부감으로 검을 쥐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 때문에 신관 출신의 기사를 유약하다고 취급하며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아 그 따돌림을 견디지 못하고 퇴역하는 일도 잦았다. 그들은 절실히 필요한 존재이나 존재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와카토시는 강한 신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운용력 역시 누가 가르칠 수준을 스스로 넘어섰다. 그리고 걷는 것과 동시에 검을 들었다. 다른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시기에 제 키만 한 쇠붙이를 휘둘렀다. 모두가 와카토시를 칭송했으나 황제만은 점점 제국의 초대 황제의 초상화를 닮아가는 제 후계자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검은 눈동자가 그때마다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의심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 눈빛에 황제는 언제나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 손을 펼쳐 거기에 남은 상흔을 보았다. 그때 한 마법사가 알현을 청했다. 시급하다고 전하는 시종의 말에 황제는 마족에 관한 것임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보고가 올라왔다. 공간은 점점 더 여러 곳에 비틀린 문을 생성했다. 마족이 이곳으로 넘어와 살육을 일삼았고 황제의 군대는 그 이계의 것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황제는 또 한 번 이것이 진짜 신의 뜻인지 아니면 악마의 간계인지 혼란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마법사를 안으로 들였다.
“더 많은 신력이 필요하옵니다. 폐하.”
“짐더러 어쩌란 말인가. 신전에서는 치료를 위해 신관들을 파견해주겠다지만 그마저도 거기 가서 피를 보고 픽픽 쓰러진다는 소식인데 대신관에게 말해서 신관들에게 칼을 쥐여 주라고 한들, 그들이 쥐 한 마리나 잡겠나?”
“하오나 이대로는 큰 피해가 우려되옵니다. 검은 숲을 폐쇄해도 다른 곳에서도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사옵니다. 그 크기 역시 무시할 수준이 아니옵니다. 마법사들을 각지로 파견한 탓에 수도에 남은 이들이 많지 않사옵니다. 만약 지금보다 더 크게 일그러진다면 수도를 방비하기에 턱없이 부족할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부디, 각 영지로 파견한 마법사들을 소집하시고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이옵니다. 폐하.”
“근본! 대체 그 근본이 뭐란 말인가! 공간이 열리지 않게 하는 게 그대들이 할 일이 아닌가? 도대체 짐이 뭣 때문에 그동안 마법에 공을 들여왔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저쪽으로 가서 마족을 씨 하나 남기지 않고 죽이고 오면 이게 끝나나? 하지만 그게 가능하냔 말이다!”
“신력의 보호를 받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인간이 마계로 넘어가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오나 그쪽으로 넘어가면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사옵니다.”
“대신관이 짐의 말을 듣기나 할 것 같은가! 앉아서 기도나 하며 이게 다 신의 시험이란 소리나 지껄이는 자들이 뭘 알아서! 그들이 뭘 했나! 하는 것이라곤 고작 기도회, 기도회. 그리고 뭐? 마족이 자주 출몰하는 게 짐의 부덕함 때문이란 소릴 하고 있는데 짐이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해!”
와카토시가 태어난 이후 신전은 노골적으로 와카토시를 향해 지지를 보냈다. 갓난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나 황비와 그 세력들은 신전의 태도를 환영하며 의기투합해 채 돌이 지나지도 않은 아이를 황태자 자리에 올리길 종용했다. 황제는 자신에게 아들은 아직 와카토시밖에 없으니 쓸데없이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말하며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으나 그들은 점점 더 소리 높여 말했다.
황제는 황비는 물론 자신의 정부들과 잦은 잠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황제의 아들을 잉태하진 못했다. 황제는 점점 더 이게 악마의 계략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의 뜻이라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하나도 없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순 없었다. 와카토시가 태어나고 8년. 황제는 그동안 황비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황녀와 다른 정부들 사이에서 여섯 명의 여자아이를 보았을 뿐이었다.
황제는 와카토시가 없다면, 이란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와카토시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국 실행할 수 없었다. 와카토시가 신의 뜻에 의해 태어난 아이든 악마의 간계로 태어난 아이든 와카토시를 죽이면 황제 역시 곱게 죽지 못할 것만 같아서였다.
“그렇게 신력이 필요하다면 와카토시는 어떤가.”
“폐하?!”
이제 막 여덟 살이 되었을 뿐인 와카토시를 보며 황제가 말해다. 마법사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언성을 높였지만 와카토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대신관조차 잠재력을 가늠하지 못하겠다고 혀를 내두른다 한들 와카토시는 아직 유모의 치마폭에서 둘러싸여 노는 게 더 어울릴 나이였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저런 얼굴일 거라 생각하며 황제는 피식 웃었다.
“폐하, 황태자전하께서는 아직 미령하시온데 어찌….”
“그래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하오나 전장이옵니다. 그것도 마족의 몰려드는 곳이옵니다. 그런 곳에 황태자 전하를 보내겠다 하시옵니까.”
“그러라고 신께서 보낸 것 아닌가?”
“폐하….”
황제는 왕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손에 턱을 괴었다. 그래도 시선보다 아래에 있는 와카토시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마법사의 말처럼 황태자가 제 아들이라면 황제는 여덟 살 난 어린아이를 마족들이 내뿜는 독한 공기에 나뭇잎이 말라비틀어지는 곳으로 보낼 생각 같은 걸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빤히 자신을 보는 이 아이는 황제의 아들이 아니었다.
“가겠느냐.”
황제가 물었다. 와카토시는 눈꺼풀을 한 번 깜박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마족은 이곳에 존재해선 안 될 존재이옵니다.”
“흠….”
“소자가 할 일이 있다면 가겠사옵니다.”
“그래, 과연 와카토시로군. 출전을 허락한다.”
어둠이 깔린 녹음을 닮은 눈동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신성한 임무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예. 폐하.”
“세상을 구하는 것이 ‘와카토시’의 운명이라면, 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겠지.” 왕은 그렇게 말하며 어린 와카토시를 전장으로 내몰았다. 불안과 기대를 등지고 와카토시는 제 힘으로 오를 수 없는 말 등에 앉아 마족이 출몰한 지역을 향해 황제의 군대의 선두에 섰다.
제 몸 하나 가누기도 어려울 듯한 어린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우려와 달리 와카토시가 함께한 군대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였다. 마계와 다름없어진 검은 숲 일부분을 와카토시의 신력으로 원래대로 복구할 수 있었다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마법사를 보며 황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과연 와카토시라는 칭송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황제는 누구 덕분에 그곳에 마족을 토벌할 군대를 보낼 수 있었는지 잊은 채 단지 우연일 뿐인 일을 말도 안 되는 전설이라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식간에 침묵하는 이들을 지나쳐 와카토시에게 치하의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알현실을 나갔다. 손을 들어 올려 황금의 관이 아직 제 머리 위에 있음을 확인한 황제는 나긋한 손놀림으로 자신을 위로해줄 어린 정부의 방을 향해 걸었다.
황제가 올 줄 알았으면서도 일부러 놀란 듯 호들갑스레 입가를 가리며 웃는 모습을 보며 그는 여인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겼다. 한껏 애교를 담은 목소리로 “와주셔서 기뻐요.”라고 말한 여인은 황제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치맛자락이 황제의 걸음을 따라 너울거렸다.
“모두가 폐하의 은덕을 당연히 여겨 불충을 저지르는 것 아니옵니까. 폐하께서는 너무 관대하셔요. 소녀라면 전부 벌을 내렸을 것이옵니다.”
“하하. 짐이 어찌 그러겠느냐.”
“못된 말을 하는 자들은 혼내주셔야지요.”
“네가 뭘 몰라 하는 소리지.”
황제는 하늘하늘하게 속살이 다 비치는 속옷 차림으로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며 야살스레 몸을 엉겨오는 여인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가서 죽어버리기라도 했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황제는 봉긋하게 솟은 하얀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짐이 황제이건만. 그는 와카토시를 향한 경외의 눈빛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와카토시가 태어난 뒤로, 아니 황비가 회임한 이후 황제는 단 하루도 편히 잠든 날이 없었다. ‘와카토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와카토시’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 황제는 그 아이를 해칠 수 없었다. 차라리 태중에 있을 때 황비와 함께 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와카토시’의 신력을 기대하는 마법사들과 인간을 향한 신의 자애를 대변할 존재를 원하는 신관들과 ‘와카토시’의 외척이라는 세력을 얻고 싶어 하는 황비의 모국은 하나같이 황제에게 모체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길 강권했다.
황제는 결국 제 손으로 황비와 태어날 아이를 최우선으로 지킬 것을 명했고 하루하루 황비의 배가 부푸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황비의 뱃속에 든 ‘와카토시’를 해하고 싶었다.
황제에겐 다행스럽게도 제국 주변 국가들은 ‘와카토시’의 탄생을 당연히 원하지 않았다. 대륙을 통일하며 세워진 제국에서 독립한 왕국들에 가장 큰 시련은 ‘와카토시’였다. 제국은 언제나 그 이름과 함께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이번에도 ‘와카토시’가 태어난다면 그들 중 또 일부분은 다시 제국에 예속되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탓에 황궁에 유례없이 많은 자객이 숨어들었다. 황궁에 잠입해 활동하던 다른 왕국의 첩자들도 성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제 임무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황비는, 그 뱃속의 ‘와카토시’는 신의 가호를 받아 모든 위험에서부터 살아남았다. 모두에게 ‘와카토시’를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처럼 비쳤다.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는 이미 신의 권능의 일부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황제는 ‘와카토시’가 언제 제 자리를 빼앗을지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신이 아무리 선정을 베푼다 해도 모두가 ‘와카토시’를 칭송하는 듯했다. 황제는 국정에 논란이 일 때마다 ‘와카토시’를 보낸 신의 뜻에 따르라며 점점 국정을 멀리했다. 무엇을 해도 제 뜻보다는 신인지 무엇인지 모를 ‘와카토시’의 뜻이 더 중요할 테니 자신의 의도는 아무래도 좋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황제가 대신들을 마주하는 시간보다 정부의 치마를 헤집는 일에 할애하는 시간이 커질수록 마계와 연결된 일그러진 공간은 점점 더 늘어났다. 황제는 그에 관련된 일을 와카토시에게 미루었다. 황태자의 나이가 어리다고 우려하던 이들도 매번 마족 토벌전에 다녀온 와카토시의 성과를 보고 점점 더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어둠이 빛을 침범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족들은 와카토시의 신력을 두려워하며 물러났다. 그것만으로도 그 어떤 마법사나 신관이나 기사들보다 대단할 터인데 그는 무용 역시 뛰어났다. 고작 열 살에 검으로 마족을 죽였다. 열두 살에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독기를 내뿜는 수십 마리 마족들에게 그를 따르는 기사 한 명만 대동한 채 뛰어들었다. 일그러진 공간 한 곳에서 그만한 수의 마족이 넘어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책을 세우지 못해 그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을 때 와카토시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놀라 만류하였으나 와카토시는 그의 말 위에 훌쩍 뛰어올라 마족을 향해 달려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그를 따른 기사는 와카토시 신력의 가호로 안전할 수 있었다. 단숨에 마족을 물리치고 온 그 앞에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와카토시는 그 모습 또한 표정없는 눈으로 바라볼 뿐 아무런 말 없이 군대를 이끌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와카토시를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대신들은 그런 황제를 점잖게 비난하며 황태자를 치하할 것을 종용했으나 황제는 어차피 ‘와카토시’의 일이지 않느냐고 말하며 광인처럼 웃었다. 모두가 목소리를 낮추어 황제가 저리 될 것을 알아 신이 ‘와카토시’를 보낸 것이라 수군거렸다. 황제는 제 귀에도 들리는 그 말에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새로운 정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당겨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게 하고는 “너도 짐이 미쳤다고 말해보려무나.”라고 말했다. 어린 소녀가 겁에 질려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면 “네가 감히 짐을 피하느냐! 짐이 광증이 들었다고 그런 얼굴을 하는 거냐! 너도 와카토시에게 가고 싶은 것이냐! 짐을 버리고 와카토시에게 가려고 하는 거냐!!”라고 다그치며 손을 휘둘렀다.
황궁에 어린 여자아이의 비명이 울리는 일이 잦아졌다. 수도에 범죄자를 잡기 위해 경고하는 종소리가 울리는 일이 많아졌다. 세금을 걷어 황궁으로 오는 행렬이 습격당하는 일이 늘어났다. 옛날부터 마계로 통하는 문이 있어 검은 숲이라 불리던 넓은 숲뿐만 아니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숲이 신력과 마법의 결계로 폐쇄되었다. 각 영지에서 황제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황궁으로 달려오는 영주의 가신들이 줄을 이었다. 마족이 제국 곳곳에 나타나고 아수라장이 된 마을 하나가 몰살되는 일도 있었다. 자연재해가 겹치고 사람들은 살기 위해 약탈을 자행했다. 불안이 팽배한 곳에 사람들의 웃음이 사라졌다. 안전한 지역으로 몰려가는 난민의 수가 늘어나자 그들을 원하지 않는 영주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사람들은 황제에 대한 원성을 높였고 신의 자비가 보이지 않는 세상에 절망했다. 와카토시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그가 진짜 ‘와카토시’가 아니라고 떠들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또 웃었다.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 건 허울 좋은 옛날이야기란 말이다. 저건 와카토시가 아니라 악마가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보낸 거야.”라고 말하며 벌거벗은 어린 여인의 몸뚱이를 끌어안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겁에 질린 소녀가 황제를 피해 도망가려 하자 그는 연약한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흔들며 소리쳤다.
“짐이 황제다! 짐이 제국의 황제다!!”
그리고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여인의 몸을 취했다.
“아들을 낳아라. 그 아이가 황제가 될 것이다. 짐의 아들이 짐의 제국을 이어받을 것이다. 아들을 낳아! 황자를 낳아라!!”
발악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황궁을 뒤흔들었다. 궁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황제와 그의 정부가 있는 방에서 멀어졌다.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지만 그 누구도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와카토시는 때때로 황제의 울부짖음과 여인의 비명이 들리는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 문을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눈으로 한동안 그곳을 주시하고 있자면 시종이 다가와 황비가 부른다며 그를 데려갔다. 황비는 제게 다가오는 아들 앞에 기꺼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그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나의 고결한 와카토시. 추악한 것을 가까이하지 마세요.”
“…황제가 되면 폐하처럼 되는 것이옵니까?”
“오, 이런. 와카토시. 아니랍니다. 태자의 스승들이 알려주지 않던가요. 이 제국에 얼마나 많은 위대한 황제들이 계셨는지. 태자와 같은 이름의 황제들이 어떻게 신의 자애로움을 대변하셨는지 듣지 않았나요.”
황비는 부드러운 손으로 와카토시의 뺨을 쓰다듬었다. 황제나 황비와는 다른, 시라토리자와 제국의 첫 황제인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뚜렷하게 닮아가는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으며 황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미는 안답니다. 내 아들, 제국의 황태자, 신의 은총인 와카토시가 얼마나 위대한 황제가 될지 알고 있어요. 태자는 그 어떤 황제보다도 훌륭한 황제가 될 거랍니다.”
벅찬 눈을 한 황비가 와카토시의 뺨에 입 맞췄다. 와카토시는 언제나 자신을 보면 같은 말을 하는 황비 앞에서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황비는 “아아, 어쩜 이렇게 의젓할까요. 나의 와카토시.”라고 감격해 하며 다시 아들을 끌어안았다.
와카토시는 가만히 선 채 먼 곳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인간을 지나 그 너머의 곳에 머무는 듯했다.
황제는 점점 더 여인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잠자리를 거부하는 황비와 대면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잦은 동침은 황제의 건강을 악화시켰고 그로 인한 어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여인를 품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와카토시가 있다고 해도 황제는 황제였다. 한 조각의 이익을 얻기 위해 황제에게 여자를 떠안기는 이는 끊임없이 존재했다. 돈에 팔려 온 시골 처녀, 스스로 황제의 정부가 되고 싶어 하는 귀족의 사생아, 그리고 귀족에게 대가를 받고 황제를 유혹한 창부가 있었다. 황제는 그녀들의 출신이나 신분은 개의치 않았다. 원하는 것은 그게 누구이든 여인의 몸에서 제 아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그 품에 안긴 모든 여자에게 아들을 낳으면 황비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늙고 추악한 모습으로 황제는 나이 어린 여인들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음부를 벌려 제 씨를 뿌렸다. 하지만 겁에 질려 울부짖던 이도 황제의 귓가에 아들을 낳아주겠다고 간교하게 속삭이던 이도 아무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황제는 태어난 여아와 그 산모를 찢어 죽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던 황제가 병에 걸렸다. 황궁의 사람들은 신이 벌을 내린 거라고 수군거렸다. 몸 곳곳에 피고름이 흐르고 성기는 썩어 문드러져 더는 씨를 뿌릴 수 없었다. 황제는 침상에 누워 조금씩 죽어갔다. 어의가 조제한 약도 치유마법도 소용없었다. 신관은 신께 회개 기도를 올리고 신력으로 치료를 받으라고 말했지만 황제는 그런 신관을 쫓아내고 여인을 데려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황제가 국정을 돌보지 못하자 제국의 국력은 빠르게 쇠퇴했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마족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영주의 성을 습격하는 일도 많아졌다. 황제의 가호를 바라며 수도로 올라오던 영주의 가신들이 마족과 폭도를 만나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버석한 입술 사이로 “짐의 아들이 제국의 황제여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때 제국의 모든 것을 발아래 둔 시라토리자와의 황제는 지금 시체보다도 약한 악취를 풍기며 조금씩 죽어갔다.
시종은 마지막으로 신관을 불러 신에게 그의 정원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는 회개 기도를 권했다. 하지만 황제는 드문드문 치아가 빠지고 잇몸이 문드러진 입을 벌려 웃었다. 신 같은 건 없다고 말하며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시종은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린 채 멀찍이 선 황비에게 제국의 후계자인 황태자를 모셔오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황비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고 황제는 가래가 들끓는 목소리로 “그건 짐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황제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그 자리에 선 이들은 광증으로 죽음에 이른 황제를 어리석다 생각했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와카토시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그 뒷말은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황제의 말라 비틀어진 머리가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마지막 나뭇잎이 떨어지듯 툭 옆으로 넘어갔다. 어의가 황제의 서거를 선언했다. 모두가 양손을 맞잡고 엄지에 입 맞추어 신에게 자비를 구했다. 아무도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와카토시의 열다섯 번째 탄생일, 아직 빛이 없는 새벽이었다.
여명은 새로운 황제와 함께 찾아왔다. ‘와카토시’라는 이름이 주는 희망과 고작 열다섯 나이라는 무력함이 주는 실망을 황금의 관과 함께 머리에 얹고 왕좌에 앉은 와카토시는 제국의 황제로서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이곳에 침범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족을 소탕하고 마계를 지배하는 마왕을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라 말했다.
마왕이라는 말에 좌중이 술렁였다. 마왕은 제국의 초대 황제인 ‘와카토시’의 전설과 함께 하는 단어였다.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나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검은 뿔과 붉은 눈을 가진 마왕은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인간을 유혹하여 그 피를 마신다고 전해졌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상이 벌어졌고 사람들은 신을 찾는 것조차 잊은 채 지옥의 악귀처럼 발버둥 쳤다. 그때 신의 대리자인 천사가 나타나 ‘와카토시’에게 마왕을 몰아낼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전해졌다.
긴 시간과 많은 희생을 바쳐 ‘와카토시’는 마왕을 마계로 몰아넣고 세상과 마계의 통로를 닫았다. 그 후로 마족이 간간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은 있어도 마왕이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막 황위에 오른 와카토시가 마왕을 입에 담자 사람들은 큰 재앙이 그와 함께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와카토시는 선황의 치세에 무너져내린 것을 복귀하는 것과 동시에 군사력에 힘을 쏟았다. 많은 마법사와 신관이 군대에 속하게 되었다. 민심을 수습하는 것보다 군대 양성에 힘을 기울이는 와카토시의 방침에 우려를 보이는 이들이 있었으나 다들 황제가 ‘와카토시’였기에 앞에 나서서 그에게 반대하지 못했다.
새 황제는 전장에 직접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가 신의 가호를 받고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전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마족을 토벌했다. 신관을 보내 마족이 내뿜은 독으로 오염된 땅을 정화하고 마법사를 동원해 자연의 회복을 도왔다. 난민을 이주시켜 땅을 일구게 하고 수확물이 날 때까지 세금을 면제해 안정을 도모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제국은 회복하는 듯 보였다. 사람들은 황제인 와카토시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와카토시는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할 뿐이었다.
“신에게 이를 말씀이 있으시옵니까. 폐하.”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보고를 받던 와카토시는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돌려 그 말을 한 이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지?”
“깊이 살피시는 듯하여 여쭙사옵니다.”
“아니, 계속해라.”
“예.”
선황 때부터 황제 직할령의 보고서를 취합, 정리하던 일을 하던 세미 에이타는 황제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제 말을 시작했다. 와카토시는 세미의 보고를 들으며 정면에 자리한 장식장 위의 금칠한 조각상을 주시했다. 새의 그것과 같은 커다란 날개를 펼친 천사는 손에 긴 창을 들었고 그 창끝은 아래로, 거대한 숫양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큰 뿔을 가진 숫양의 몸의 뒤틀림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천사의 날개 깃 하나하나의 섬세함을 모두 갖춘 조각상은 신에게 바칠 제물을 도살하는 천사의 모습과 숫양의 뿔을 가진 마왕을 처단하는, 천사의 힘을 빈 제국의 초대 황제 ‘와카토시’를 나타내었다.
“결국 군사훈련 시설을 확장하기 어렵다는 건가?”
“…예.”
“수단을 가리지 말라고 해라. 반년 안에 짐이 이른 만큼 병사를 채워두도록 해.”
“하오나 폐하. 시설도 인력도 부족하옵니다. 시간을 더 주시거나….”
“짐이 의견을 말하라 했나?”
“…송구하옵니다.”
“더 줄 시간은 없다. 시라부.”
“예. 폐하.”
단호한 와카토시의 말에 세미는 입을 다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신 이름을 불린 시라부가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 직속 마법기관에 속한 시라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해온 마법 도식을 기록한 긴 종이를 펼쳤다. 마법에 관해 문외한인 세미는 와카토시와 시라부가 나누는 대화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자신을 내보내고 시라부의 보고를 들을 텐데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그저 자리를 지키고 설 뿐이었다. 한참 대화가 오가다 잠시 시라부가 말을 중단했다. 그리고 곧장 그는 묵묵히 자리에 선 세미를 흘끔 보더니 황제에게 마계와 연결된 공간을 넓히는 마법에 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용어들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지만 세미는 시라부의 말에서 검은 숲에 비교적 넓게 생성된 일그러진 공간을 확장하는 데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커다란 하나의 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마법을 걸어 마계의 힘과 충돌하는 작은 마법으로 미세한 틈을 만들고 그 틈을 마법으로 넓혀 공간의 일그러짐을 확장한다는 내용이었다. 하나는 그저 작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힘이 모이면 만 명 정도의 병사를 한 번에 마계로 보낼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세미는 눈을 크게 뜨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마계로 가는 거라고?”
“네. 세미 경께서도 알고 계시는 게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시겠죠.”
“아니, 잠깐 시라부 경. 그래서 지금 나 들으라고 말했다는 거야? 그건 그렇고 하지만 마계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런 곳에 사람들을 보낸다고? 폐하,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허가하실 예정이옵니까? 마계로 넘어간 인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사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곳에 폐하의 백성들을 보내려고 하시옵니까.”
“있습니다.”
“뭐?”
“생환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묻어온 마력과 그곳의 생명체를 마법사들은 오래전부터 연구해왔습니다. 인간이 마계로 넘어가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믿을 수 없는데. 마족 몇 마리 때문에 염전 한 곳이 오염되어서 소금값이 천정부지로 뛴 탓에 지금 얼마나 난리인지 몰라? 그런데 그런 마족이 득시글한 곳에 인간이 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그 돌아왔단 사람 어딨어? 나 만날 수 있어?”
“평범하게 잘 살고 있으니 세미 경께서 만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똑바로 눈을 치켜뜨고 말하는 시라부를 보며 세미는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황제 앞에서 하기에는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와카토시는 개의치 않았다. 세미는 한숨을 내쉬며 와카토시를 향해 자못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폐하의 은덕으로 지난 십수 년간 어지러웠던 민정이 이제 겨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사옵니다. 이런 정국에 군사 십만을 충원하라 명하시니 신은 생업에 종사하여야 할 백성들이 원성이 높아질까 염려되옵니다. 그나마 군사를 소집하여 제국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하신다면 백성들이 기꺼이 따르리라 생각하옵니다만 생환을 보장받을 수 없는 마계로 폐하의 백성을 몰아넣는 것은 성군께서 하실만한 일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세미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장 눈앞에 적군이 밀려 들어온 것도 아닌데 반년 안에 군사 십만을 차출하라는 와카토시의 말에 속이 답답한 세미가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경의 충언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하오나 폐하. 재건을 위해선 많은 인력이 필요하옵니다. 그런 때에 폐하의 직할령에서 십만의 장정을 차출한다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민심이 악화되는 건 한순간이옵니다.”
“그렇군.”
강경하게 말하던 황제가 돌연 자신의 말을 수긍하자 세미는 석연찮은 기분이 들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 잠긴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던 와카토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재상을 불러와라. 짐의 비호를 받는 자들이 짐에 대한 충성을 증명할 기회를 주겠다.”
“예?”
“마계와 이곳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면 마왕을 처단하고 마계를 소멸케 할 것이다. 제국은 안정에 이를 테고 그 대업에 일조하는 걸 영광으로 여기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마왕 토벌전, 각 공국의 대공과 지방 영주들의 반발을 세미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마계를 소멸시킨다는 게 가능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테고 아무리 와카토시의 신력이 대단하다 한들 그들은 인간이 마계를 침범하는 일을 두려워할 게 분명했다.
“…쉽지 않은 일이라 여겨지옵니다.”
“왜지? 짐의 허가 없이 신전이 오염된 땅을 정화하는 의식을 행하겠는가? 짐의 명령을 받지 않은 마법사들이 영주를 방문할까?”
세미는 언제나 생각을 알 수 없는 검녹색 눈동자를 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반년 뒤에나 열여덟 살이 될 와카토시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와카토시’이기에 신전은 황제의 편이었다. 마법의 연구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기에 마법사 대부분은 황궁에 소속되어 있었다. 마족으로 인해 어려운 형편에 처한 지금 황제의 명령을 거스를 수 있는 대공과 영주는 거의 없었다.
“짐이 직접 마계로 간다.”
“예?”
“폐하!”
세미는 순간 와카토시의 말을 자신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황제를 부르는 시라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재고해 주시옵소서 폐하. 신의 가호를 받는 폐하를 해할 수 있는 마족이 없다 하더라도 마계에 직접 행차하신다니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폐하의 뜻을 받들 것이옵니다. 폐하.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절박한 음성으로 황제를 향해 말하는 시라부를 보며 그만큼은 아니어도 황제의 결정이 성급하단 생각이 들어 세미는 시라부의 말을 거들었다.
“폐하께서 계셔야 제국은 오롯이 제국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시라부 경의 말에 틀린 점이 없으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번복은 없다.”
“폐하!”
“물러가라.”
단호한 축객령에 결국 시라부와 세미는 더 말하지 못하고 집무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문을 나선 후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시라부를 보고 세미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마법으로 충분히 인간도 마계에 갈 수 있다며. 그럼 폐하께서 가도 상관없는 것 아냐? 뭘 그렇게 흥분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갈 수야 있죠. 갈 수는 있다고 안전하단 보장은 없잖아요! 폐하께서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걸 보고만 있을 작정이에요. 그럼?”
“누군가는 가야 하잖아.”
“그래요. 그래도 그게 처음부터 폐하일 순 없죠. 마계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가시게 둬요.”
“그럼 처음이 아니면 괜찮다는 거야?”
“폐하께선 ‘와카토시’이시죠. 현존하는 가장 강한 신력을 가진 분이시라고요. 마왕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확실히 폐하시겠지요. 마왕을 이쪽으로 유인하는 방법도 생각해봤는데 거의 가능성이 없어요. 피해가 얼마나 클지도 모르고요. 마계와 이어진 공간을 완전히 닫으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럼 마왕을 퇴치하고 마계를 쓸어버리는 게 이 사달을 영원히 멈추는 방법이겠죠.”
“위험하지 않아?”
“위험하죠. 당연히. 지금까지 그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무슨 얼빠진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니, 내 말은 거길 폐하께서 가시는데 처음만 아니면 안 말린다고?”
“황제시잖아요. 그리고 ‘와카토시’이시고요. 누가 그분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죠?”
“그건 그렇지만. 난 하도 다급하게 소리 지르기에 폐하께서 마계 근처엔 머리카락 하나 가까이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고 전전긍긍하는 줄 알았지.”
“안 가시고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가장 좋겠죠.”
시라부는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세미는 그런 그의 곁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왕이 진짜 있을까?”
“여기에도 황제께서 계시는데 마계에도 있겠죠.”
“그런가….”
“네.”
“어떻게 생겼을까.”
“전설이 사실이라면 매우 아름다운 얼굴이겠죠. 지금까지 봐온 마족들 꼴을 봐선 썩어 문드러진 생선 대가리만도 못할 것 같지만요.”
“넌 말을 뭘 그렇게 하냐.”
“세미 경은 많이 못 봐서 그래요.”
“음…. 다 그렇게 이상하게 생겼어?”
“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시라부의 말에 세미는 제가 지금껏 본 마족의 형체가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아 참, 그런데 아까 말한 거 말야. 어떻게 한다는 거야? 병사들에게 일일이 마법을 걸면 그것도 마법사들이 엄청나게 필요한 거 아냐?”
“특수한 보석에 마력을 가두고 있어요. 그리고 마법문을 패에 새긴 형태로 주조해서 거기에 신력을 부여할 거예요. 마석을 결합해서 몸에 지니면 사람에게 마법을 건 것과 같은 효과가 있죠. 실험은 이미 끝났으니까 만들기만 하면 돼요. 십만 개라서 앞날이 까마득하지만요.”
“그럼 사람은 없어도 되는 거 아냐?”
“사람이 지니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다 해봤죠. 개라든가 새라든가. 무생물도 해보고요. 마력과 신력이 동시에 작용해서 일정 시간 유지되면서 이동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무생물에 적용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닌데 그러려면 효용성이 너무 낮아요. 그리고 이게 힘을 분산시키는 거니까 위험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부가 붕괴하더라도 완전히 무너지진 않는다는 장점이 있죠.”
“마법은 들어도 들어도 모르겠단 말이지.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다는 게….”
“마계로 통한 공간을 열어야 하고 마계로 가서 마왕을 찾을 때까지 마족을 물리칠 군사도 필요해요.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죠. 솔직히 말하자면 전 십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폐하께서 가신다면 더더욱 모자란다고요. 하지만 와시오 재상과 오오히라 장군이 그 이상은 무리라고 해서 거기서 타협한 거라고요.”
시라부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얼굴로 길을 재촉했다. 세미는 뭘 어떻게 하더라도 십만의 군사와 함께 와카토시가 마계로 출정하는 건 바뀌지 않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오의 햇살이 아치에 새겨진 조각 사이를 파고드는 회랑을 따라 걸었다.
다사다난한 반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와카토시는 황금빛 갑주를 몸에 두르고 그의 병사들 앞에 섰다. 마계로의 출정을 달갑지 않아 하던 이들도 황제가 직접 참전한다는 소리에 입을 다물고 자신의 병사를 차출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살아 돌아온 인간이 한 명도 없다고 알려진 마계로 첫발을 내딛게 되는 이들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다. 단 한 명, 황제인 우시지마 와카토시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병사들과 검은 숲을 둘러볼 뿐이었다.
예로부터 마계와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검은 숲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장소였다. 숲에 우거진 높은 나무는 햇빛을 가리고 늘 습하게 젖은 땅에선 안개가 맺혀 있었다. 사람이 들어가면 우연히 마계로 넘어가지 않더라고 길을 잃고 헤매다 죽음에 이르는 일이 잦은 곳이었다.
선황 때 마족의 출현을 막기 위해 결계를 쳐놓은 이곳에 얼마 전 마족 토벌전이 있었다. 마계로 넘어가는 길을 열기 전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직접 선두에 섰고 유례없이 많은 마법사와 신관이 참전했다. 검은 숲을 둘러싼 결계를 지우고 신력으로 오염된 땅을 정화하며 검은 숲에 잔존하는 마족을 모조리 사살했다. 작게 공간의 일그러진 곳 하나하나에 결계를 치면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을 찾았다.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렀다.
마법사의 지휘로 병사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 준비한 대열로 늘어섰다.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가자 수백 명의 마법사가 마법진에 마법문을 쓰듯 차례로 병사들에게 패를 건넸다. 자주색 보석이 박힌 평범한 주석 패가 하나씩 병사들의 손에 들어가자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숲 속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가득 찼다. 시라부는 마지막으로 와카토시에게 가 그 앞에 무릎 꿇었다. 황제의 왼손목을 보호한 갑주 위에 두른 황금으로 만든 브레이슬렛을 받쳐 쥐고 거기에 적힌 마법문을 읊조렸다. 단어의 음 하나도 틀리지 않기 위해 자면서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외우고 또 외운 마법문이었다. 시라부의 목소리 위로 와카토시의 낮은 음성이 겹쳐졌다. 마계를 향한 틈이 모두에게 보일 만큼, 물결이 치듯 크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공기를 가르는 웅웅대는 소리가 숲을 뒤흔들자 마족을 토벌한 후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새들이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라 숲에서 멀어졌다.
시라부는 끊임없이 길고 긴 마법문을 외었다. 와카토시의 성력이 마법을 타고 병사들로 만들어진 마법진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에서 발휘된 힘이 황제의 등 뒤로 보이는 마계와의 연결부를 점점 더 크게 만들었다. 그저 아지랑이가 일듯 출렁이던 공간에 점점이 검은 얼룩이 생겨났다. 그 얼룩은 점점 더 크고 진해지더니 시라부가 마법문의 마지막 단어를 읊고 몸을 일으켰을 때 까마득한 크기의 거대한 검은 원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종이에 떨어진 검은 잉크 자국 같으면서도 바닥을 알 수 없는 웅덩이처럼도 보였고 거대한 검은 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자연적으로 세상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점이었다.
시라부가 와카토시의 손에서 제 손을 떼어내자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뒤에서 오오히라가 대열을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2개 대대 정도는 거뜬히 한 줄로 늘어서 통과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검은 원 안으로 와카토시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시라부는 황제에게서 물러서 깊게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십만의 병사들이 일제히 행군을 시작하자 그 움직임만으로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인간들이 마계로 사라졌다. 이곳에 남은 병사의 수가 줄어들수록 원의 크기도 줄어들었다. 시라부는 마지막 병사가 검은 원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은으로 주조해 마법문을 새긴 커다란 비(碑)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그 비를 마지막 병사 뒤로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검은 원이 사라지고 공간은 다시 파문을 일으키더니 처음처럼 아지랑이보다도 희미한 공간의 일렁임만을 남겼다. 비가 중간에서 뚝 잘린 듯 사라져 있었다. 그것은 황제와 그의 군사들이 마계에서 이곳으로 다시 넘어오기 위한 표식이었다. 시라부는 황제가 부디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곳에서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신관들과 함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신력을 부여한 패를 지니고 와카토시의 신력에 비호를 받으면서도 병사들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힘겨운 행군을 이어가고 있었다. 와카토시는 시라부와 대신관에게 보고받은 이야기대로인 마계를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낮게 떠 있는 두꺼운 황회색 구름은 곳곳에서 소용돌이를 만들고 그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개를 내뿜었다. 천둥소리가 거대한 수차를 끌듯 하늘을 긁어대는 소리를 내며 하늘을 요동시켰다. 태양은 보이지 않았으나 두꺼운 구름 아래 세계는 밤처럼 어둡지 않았다. 모든 것이 풍화되어 모래로 바스러진 듯 바닥은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밭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그곳의 모래는 그저 바닥에 쌓여있었고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바위가 굴러다녔다. 와카토시는 그의 갑주와 마찬가지로 마법문을 새기고 신력을 부여한 투구를 벗어들었다. 마계에서 견디기 위해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이 조처를 받은 것이었다. 놀란 오오히라가 곁으로 달려오자 와카토시는 고개를 저었다. 마계의 독은 역시 와카토시에게 아무런 해를 입힐 수 없었다.
시야가 넓어지자 저 멀리 하늘에 거대한 구름 소용돌이가 보였다.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그 아래 자리한 검은 성이 위용을 드러냈다. 외형을 보고 온 자는 내부를 본 자가 없는 마왕의 성. 와카토시는 마치 그대로 공간을 집어삼켜 만들어진 듯한 검은 마왕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대열 가장 끝에서 은으로 만든 비의 첨단 부분을 확인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와카토시는 전군에게 마왕성을 행군을 명했다. 모랫바닥에 발이 묶여 빠르게 이동할 수는 없지만 황제의 군대는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손에 잡힐 듯한 마왕성은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그곳을 향해 가는 동안 와카토시는 많은 마족을 맞닥뜨리고 그 마족을 처단하며 많은 수의 병사를 잃었다. 마족 때문이 아니어도 이 마계에 있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이들도 생겼다. 그래도 와카토시는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걷고 또 걷고 수많은 마족을 그의 검으로 베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종국에 와카토시는 목적한 장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마왕성은 와카토시의 황궁과 달리 넓다기보단 높았다. 하늘을 꿰뚫을 것 같은 십수 개의 뾰족한 첨탑이 까마득하게 위로 솟아 있었다. 창문이 없는 그 건물은 모든 것이 검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와카토시는 좀 더 그 성에 가까이 다가갔다. 정면에 난 유일한 문은 그의 예상대로 굳게 닫혀 있었다.
오오히라의 명령을 받은 병사 몇이 손잡이가 없는 문을 앞으로 밀었다. 하지만 거대한 그 문은 인간의 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난감한 오오히라가 황제에게 와카토시는 그들을 물리고 직접 문앞으로 다가갔다. 황제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은 오오히라는 난색을 표했으나 황제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와카토시는 성의 외벽과 마찬가지로 온통 검은 문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밀자 손이 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놀란 오오히라가 옆에서 와카토시를 붙잡으려 하는데 그는 그의 신하들을 내버려두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손에 들었던 투구만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오오히라는 황제의 투구를 집어 들고 술렁이는 병사를 진정시켰다. 이곳은 마계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이 안으로 들어간 황제는 ‘와카토시’였다. 누구보다 강한 신력을 지닌 그는 신의 의지로 태어난 제국의 황제였다. 마계는 그에게 해를 입히지 못했다. 설사 그것이 마왕이라 하더라고 와카토시는 무사할 것이라고. 오오히라는 그 믿음을 다시 곱씹으며 황제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을 지키라고 병사들에게 말했다.
인간의 신전에도 없는 높은 천장이 와카토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 하나 없는 이 성 안은 붉은 초를 한가득 켜놓은 듯 불그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와카토시는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높디높아 천장의 끝이 검은 점처럼 보이는 그것은 마치 하늘로 향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듯했다. 와카토시는 다시 고개를 내려 앞을 보았다. 검은 바닥이 정면의 단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단 위에 마족을 뒤얽어 만든 듯한 기이한 모양의 왕좌가 있었다. 그리고 침상에 가까우리만치 넓은 그것에 반쯤 몸을 뉘어 기댄 인영이 있었다.
와카토시는 앞으로 걸었다. 눈앞의 그가 마왕이라는 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겨울에 내린 눈보다 창백하고 하얀 얼굴, 와카토시를 내려다보는 피처럼 붉은 눈, 그리고 그의 머리에 자리한 숫양의 것을 닮은 검은 뿔. 긴 검은 망토가 그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비져나온 하얀 손이 제 얼굴을 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처럼 붉은 입술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와카토시를 보며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와카토시는 망설이지 않고 단 위로 올라갔다. 마계로 넘어올 때도, 이 성으로 들어올 때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심장이 마왕을 보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와카토시는 제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뛸 수 있다는 걸 태어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막무가내로 마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왕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와카토시의 손을 마왕에게 닿지 못했다. 마왕은 와카토시의 손가락 사이에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얽었다.
“너무 급한 것 아니야? 폐하?”
하얀 얼굴에 자리한 붉은 입술이 열렸다. 와카토시는 조금 전보다 더 심장이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심장이 터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제 기능을 상실한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대단하네. 우시와카.”
와카토시는 마왕이 말하는 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마왕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보다 제 욕망이 중요했다. 왜 이곳에 오려고 했는지, 왜 마왕을 만나려고 했는지. 마왕의 얼굴을 보자 와카토시는 저가 마왕성으로 온 이유를 이해했다. 이 자를, 마왕을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는 욕망. 와카토시는 마왕에게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그를 향해 뻗었다. 마왕은 웃으며 그 손마저 마주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공중에 떠오르는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비슷한 눈높이에 자리한 마왕의 눈동자가 보석보다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기다렸어. 폐하.”
붉은 입술이 벌어진 것을 보자 와카토시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손을 끌어당겨 마왕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마왕은 기다렸다는 듯 벌어진 입술을 열어 와카토시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마왕은 양손을 얽었던 손을 떼어내 와카토시의 목에 팔을 둘렀다.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더 깊게 입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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