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 ALL and END ALL
발간일 : 2016년 1월 16일 우시오이 온리 'LOVE & WAR'
커플링 : 우시지마X오이카와 (R-19)
※ 책 사양
신국판 인쇄본 200 페이지
※ 가격
13,000원
※ 주의사항
● 성인이신 분들에게만 판매합니다.
● 원작 기반으로 성인이 된 두 사람입니다.
● 시라토리자와 캐릭터 등장합니다.
● 우시지마 부모님 원작 네타와 그에 따른 제 해석이 포함됩니다.
●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와 이와이즈미를 부르는 호칭은 우시와카쨩, 이와쨩 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므로 일본식 호칭 표현을 불편하게 생각하신다면 예약을 삼가주십시오.
● 본편보다 후기를 먼저 읽는 분들도 계신데 후기가 스포일러니 되도록 본편을 읽으신 후에 읽어주세요....
※ 줄거리
눈을 떠보니 낯선 병원이었다.
모든 것이 의문스러운 우시지마에게 오이카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시지마의 기억보다 몇년이 더 흐른 시간, 배구를 할 수 없는 그. 그리고 오이카와는 그가 우시지마의 연인이라고 말했다.
우시지마는 혼란스러움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는데.....
※ 샘플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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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 ALL and END ALL
눈을 떴다. 일상적인 움직임이며 매일매일, 매 순간 반복하는 일이었다. 달력상의 어제와 오늘을 가르는 시점이 12라는 숫자를 세 개의 시계바늘이 함께 가리키는 일이라면 보통 사람들이 인지하는 어제와 오늘을 가르는 분기점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행위였다. 우시지마는 그렇게 눈을 떴고 잠에서 깨어나 어제에서 오늘로 넘어왔다.
“우시와카 쨩.”
우시지마는 아직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와 달리 안개가 낀 듯 뿌연 시야의 장막을 걷으려 눈을 깜박였다.
“우시와카 쨩.”
익숙하다면 익숙한 호칭이지만 꽤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호칭이 낯설어 우시지마는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정신이 들어?”
“…오이…카와?”
“뭐야. 뭘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는 거야. 설마 오이카와 씨가 우시와카 쨩을 버리고 도망이라도 갔을 거라고 생각했어?”
“무슨….”
우시지마는 문자 의미 그대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자신의 시신경이 받아들이는 정보와 자신의 머릿속의 정보를 일치시키기 위해 신경을 집중시켰다.
“뭐야. 뭐가 이상해? 주름 생긴다고 말했지.”
손을 앞으로 내미는 오이카와의 움직임에 어색함은 없었다. 우시지마의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그리고 그 행동에 반응하는 것 또한 여상스럽다는 듯 우시지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우시지마는 그것이 너무나 어색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지만 베개에 좀 더 머리를 파묻는 정도밖에 움직일 수 없었고 오이카와의 손가락은 별 다른 저항 없이 우시지마의 미간에 닿았다.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왜 그래?”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의 손가락은 우시지마의 미간을 조금 세게, 하지만 아프진 않을 정도로 문지르다 우시지마가 억지로 미간의 주름을 폈을 때야 비로소 떨어져나갔다.
“오이카와 네가 맞나?”
“우시와카 쨩 괜찮아?”
그래도 조금은 웃음이 어렸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우시지마가 기억하는 것보다 좀 더 어른스러워진 그 얼굴은 여전히 하얬다.
“왜 네가 여기 있지? 병원인가? 왜?”
“우시와카 쨩…. 설마 지금 농담하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농담 하면 오이카와 씨라도 화낼 수밖에 없어!”
짐짓 심각하게, 하지만 다분히 가벼운 오이카와의 말에 우시지마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오이카와의 표정에서 그런 것들을 읽어내는 자신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어른스러운 오이카와가 낯설었다.
“내가 왜 농담을 하지?”
그제야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기억하는 말간 갈색눈동자를 똑바로 우시지마에게 고정시켰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너스콜을 누르고 그걸로 모자랐는지 복도로 뛰쳐나갔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어딘가 몸이 뻐근하고 오른팔에 수액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빼면 특별한 이상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곧장 간호사가 들어왔다. 이곳이 병원임을 확실히 알려주는 미색 유니폼을 입은 여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선생님이 곧 오실 테니 급하게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녀에게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 묻는 것보다 의사에게 묻는 쪽이 더 확실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듯해 우시지마는 그녀의 말대로 다시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제야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잖아도 우시와카 쨩 머리 나쁜데 완전히 바보가 된 거면 어떡해?”
“말 같은 소릴 해.”
문밖에서 오이카와와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이 아픈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시지마는 간호사에게 침대 기울기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간호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우시지마의 말을 들어주었다. 침대가 채 세워지기 전 의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기분은 어때요? 우시지마 씨?”
마치 잘 모르는데도 익숙한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같았다. 의사가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면 환자는 괜찮아요. 그런데 저에게 문제가 있나요? 라고 말하는. 식상한 대사라고 생각했는데 우시지마 역시 똑같은 것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다만.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그럼 눈을 뜨기 전 가장 마지막에 기억나는 일이 뭔가요?”
오이카와와 구면인 듯한, 밝은 색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젊은 의사는 차트와 우시지마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그의 질문에 우시지마는 조금 전부터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조금 혼란스러우신 걸 수도 있어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저번 달에 스물여섯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잠들기 직전의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한 우시지마에게 의사가 다른 것을 물었다. 우시지마는 방금 전 질문과 달리 곧장 답을 말할 수 있어 안도하며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그 대답에 조금 의아해하는 의사의 얼굴과 눈에 띄게 표정이 변하는 오이카와를 보자 더 이상 안도할 수 없었다.
“문제가 있습니까?”
“음…. 그럼 우시지마 씨 현재 직업이 무엇인지 기억나시나요?”
“배구선수입니다만?”
“우시와카 쨩! 장난치지 마!”
“너야말로 무슨 의미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오이카와?”
“잠이 덜 깬 거 아냐? 맛키, 나 우시와카 쨩 한 대 때려도 돼?”
“조용히 좀 해. 오이카와.”
의사는 당장이라도 우시지마에게 달려들려는 오이카와의 머리를 차트로 가볍게 내려친 다음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꽉 다물었다.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우시지마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뭔지 알려주십시오.”
깍듯한 우시지마의 말에 의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호자 되시는 분의 연락처는 기억나십니까?”
“보호자가 필요한 일입니까? 부모님의 연락처라면….”
“안 돼!.”
오이카와가 막무가내로 말을 가로막았다. 우시지마가 의아한 눈으로 그런 오이카와를 돌아보자 그는 격양된 목소리로 우시지마를 다그쳤다.
“부모님에게 연락하자니, 우시와카 쨩.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이카와.”
이 자리에 오이카와가 있는 것도 이상한데 계속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답답한 우시지마의 경직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지 않나.”
“우와. 세상에.”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바로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으로 우시지마의 어깨를 붙잡았다.
“우시와카 쨩, 진짜 기억 안 나? 3년 간 일들이 하나도 기억 안 나는 거야?”
“삼…년…?”
“그래! 3년! 우리 둘, 아니 맛키까지 셋 다 지금 스물아홉이라구!”
“스물…아홉?”
“그래! 우시와카 쨩 지금 그 얼굴로 자기가 스물여섯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말이 돼? 거기다 말이지….”
“오이카와. 그만둬.”
“하지만, 맛키!”
오이카와는 의사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친근한 호칭과 서로 편하게 대하는 말투에서 두 사람이 친근한 사이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유추한들 이 상황을 개선하는 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아 우시지마는 의사의 입에서 나올 말을 묵묵히 기다렸다.
“일시적인 충격일 수 있어요. 짧게는 몇 십 분에서 길게는 며칠 정도 기억에 혼선이 생기는 경우가 있으니까 조급해하지 마시고 기다리도록 해요.”
“그 말은 지금 제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증상만으로 보자면 그렇죠. 오이카와가 말한 대로 우시지마 씨는 현재 스물아홉 살이에요.”
우시지마의 무표정한 얼굴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의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차트를 손끝으로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 그래요. 며칠 전 집 앞에 쓰러진 걸 오이카와가 발견해서 데려왔는데 일단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어요. 하지만 일시적이라고 해도 충격을 받았을 정도면 뭔가 사고일 수 있으니 CT와 MRI 촬영을 해보도록 해요. 왜 쓰러졌는지는 알 것 같아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몸은 건강하다고 자부합니다만.”
“그렇죠. 우시지마 씨 꾸준히 운동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운 나쁜 사고일 수도 있고 몰랐던 내부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니 몇 가지 검사를 추가할 게요. 원인을 모르는 만큼 조급해하지 마시고 안정을 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그런 점에선 오이카와가 있어서 다행이죠.”
그 오이카와는 의사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우시지마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그런 오이카와와 의사를 번갈아 보다 자신의 의문을 이야기 했다.
“오이카와가 있어 다행이란 말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시지마의 그 말에 오이카와도 의사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자보자하니까!!”
“오이카와!”
의사와 간호사가 옆에 있다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진짜 기억 안 나는 거야? 오이카와 씨랑 우시와카 쨩의 일, 하나도 기억 못 하는 거야? 어떻게 우시와카 쨩이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오이카와 씨한테 그런 소릴 할 수 있어?!!!”
큰 소리를 지르는 오이카와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병원이라는 공간도, 오이카와라는 존재도, 자신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만 해. 오이카와!”
의사는 억지로 오이카와를 우시지마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러자 오이카와의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그것이 어딘가 낯익어 우시지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 다친 거 아냐? 안 그래도 머리 나쁜데 넘어지다가 어디 부딪친 거 아냐? 전문 병원 가자. 우시와카 쨩. 가서 정밀 검사 받아보면 뭔가 원인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응? 맛키? 그렇지?”
훌쩍훌쩍 울며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에게 호소하듯, 의사에게 확답을 얻으려는 듯 물었다. 의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쪽이 좋지요. 의사를 소개시켜드릴 테니 그곳으로 가보시겠어요?”
“병원이 싫어도 꼭 가야해! 우시와카 쨩!”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말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가 자신이 병원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고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친근한 말투와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전부 어색했다. 그래서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의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좀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혼란스럽군요.”
“아무래도 그러시죠. 원하지 않으시면 여기서 할 수 있는 검사를 하며 며칠 기다려보도록 해요.”
“네.”
우시지마는 담담히 대답했지만 옆에 선 오이카와는 그렇지 않은 듯 의사를 다그쳤다.
“그래도 괜찮은 거야?”
“괜찮아. 오이카와.”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해?”
“너무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마. 니가 그렇게 당황하면 어떻게 해? 제일 혼란스러운 건 우시지마 씨라고.”
“그건 그렇지만….”
“시끄럽게 굴지 말고 이야기 잘 나누고 있어. 다시 올게.”
“맛키, 진짜 괜찮을까?”
금방이라도 다시 울 것 같은 오이카와에게 대답 대신 작게 웃은 의사는 간호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렇게 1인실 병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너도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 되는 소릴 해.”
“무슨 의미지?”
“우시와카 쨩. 있지….”
오이카와의 아직 눈물에 젖어있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조금 초조한 듯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잘근거리며 저러다 피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입술을 씹어대던 오이카와가 침대에 걸터앉아 우시지마를 마주보았다. 오이카와의 양손이 우시지마의 왼손을 덮었다.
“혼란스럽겠지만 오이카와 씨가 거짓말 하는 거 아니니까….”
오이카와는 무척 하기 힘든 말을 꺼내려는 듯 망설이고 있었다. 울 듯 말 듯 일그러진 얼굴이 우시지마의 기억에 있는 조금 도도하리만치 자신감에 찬 모습과 달라 우시지마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오이카와의 손이 우시지마의 손을 움켜쥐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 그것을 붙잡은 오이카와의 힘이 강해 우시지마는 그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불쾌함을 표현하려는 것보다 먼저 눈물이 가득한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와 우시지마는 차마 손을 놓으라고 말할 수 없었다.
“진짜 거짓말 하는 거 아니니까….”
오이카와의 우는 얼굴은 낯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에게 저런 약한 얼굴을 보이는 오이카와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언제나 적의만을 드러내던 개암색 눈동자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나랑 우시와카 쨩이랑. 사귀는 사이야.”
숨을 고르고 비장한 표정으로 우시지마의 손을 꽉 움켜쥔 채 내뱉은 오이카와의 말에 우시지마는 한동안 반응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말하는 의미를 우시지마는 곧장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날 놀리는 거라면 그만뒀으면 좋겠군.”
“아니야!”
우시지마가 불쾌함에 눈살을 찌푸리자 오이카와는 빠르게 부정했다.
“내가 미쳤다고 이런 걸로 장난을 쳐? 우시와카 쨩은 날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고교 졸업 후 널 만난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사귄다는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그래! 스물여섯 때까진 거의 만나지도 않았지. 하지만 우시와카 쨩이 먼저 고백했잖아! 그래놓고 이제 와서 지금 하나도 기억 안 난다고 하는 거야? 우시와카 쨩이야 말로 오이카와 씨를 놀리는 거 아냐?”
“내가?”
“그래! 우시와카 쨩이! 우시와카 쨩이 그랬다구!”
오이카와는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양손으로 우시지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우시와카 쨩이 오이카와 씨가 좋다고 했잖아. 같이 있고 싶다고 했잖아.”
눈물이 일렁이며 차오르는 것을 눈앞에서 바로 보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우시지마는 그 낯선 광경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좋다고 했잖아….”
눈물에 잠겨 흔들리는 눈동자만큼이나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만큼 옷깃을 쥔 손이 떨렸고 그 떨림은 팔을 타고 전이되어 오이카와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 위에 이마를 댔다. 오이카와의 떨림이 우시지마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절로 미안해질 듯 서러운 모습이었지만 우시지마의 기억 어디에도 자신에게 매달려 우는 오이카와의 모습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오이카와….”
우시지마의 목소리를 들은 오이카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벌떡 고개를 들더니 짐짓 비장한 얼굴로 우시지마를 노려보았다.
“기억이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안 돌아와도 안 가만 둘 거야!”
“오이카와….”
“나중에 오늘 일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잔뜩 때려줄 거야.”
오이카와는 그제야 우시지마를 잡은 손을 놓고 떨어졌다. 그리고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면회시간 다 되었으니까 오늘은 이만 갈게. 그래도 깨어나서 다행이야. 오이카와 씨 진짜 걱정했단 말이야.”
“정말 지금 나는 스물아홉 살인가? 그런데 왜 내가 일본에 있는 거지? 아는 게 있나?”
우시지마는 아까부터 계속 목에 걸린 듯 답답한 문제를 물었지만 오이카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다면 가르쳐줬으면 좋겠군. 오이카와.”
“우시와카 쨩.”
“내가 어려운 걸 물었나?”
“우시와카 쨩. 놀라지 말고 잘 들어.”
“내가 일정부분 기억을 잃었고 그건 일시적일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은 이해했다. 당황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지 않나. 그럼 제대로 가르쳐줬으면 좋겠군.”
마치 사실을 들으면 우시지마가 큰 충격에라도 빠질 것처럼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우시지마는 조금 짜증스러웠다. 속 시원하게 제대로 말해주고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언짢게 변했다. 오이카와는 그런 우시지마의 상태를 눈치 챘는지 다시 침대에 앉아 우시지마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은 3월이고 우린 둘 다 올해 서른 살이 될 거야.”
“3월….”
“우시와카 쨩은 지금 이탈리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
“스물일곱 살 겨울에 우시와카 쨩은 일본으로 완전히 돌아왔어. 다음해 봄에 나에게 고백을 했고 나는 그걸 받아들였어. 우리 엄청 싸웠지만 그래도 잘 지냈고 재작년 가을부터 함께 살고 있어.”
“함께… 살고 있다고?”
“그래. 집에 돌아가면서 우시와카 쨩에게 연락을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아서 운동하러 나갔나.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나 그날 먹고 싶은 빵이 있어서 가게 들른다고 조금 늦게 집에 돌아왔어…. 맨션 근처처지 올 때만 해도 그런….”
오이카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시지마는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아서인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말…. 정말 기억 안 나는 거야? 오이카와 씨가 울면 우시와카 쨩이 눈물, 닦아줬는데….”
목이 매여 갈라져 나온 소리가 다시 떨렸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거기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하는지 오이카와의 말을 듣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제 소매에 눈물을 닦고는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긴 한데. 거기 우시와카 쨩이 쓰러져 있었어. 정말 놀라서…. 오이카와 씨가 조금만 빨리 돌아왔더라면 우시와카 쨩 그런 일 안 당하지 않았을까? 오이카와 씨가 빵 사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우시와카 쨩이…. 우시와카 쨩이….”
“오이카와.”
오이카와는 다시 눈가를 소매로 문질렀다. 손등으로 코 아래를 문지르는 걸 보다 못한 우시지마가 옆 테이블에서 티슈를 뽑아 건넸다. “고마워.”라고 말한 오이카와는 그걸로 얼굴을 닦곤 조금 울먹임이 잦아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시와카 쨩 어머니께 연락을 드릴까 했는데 안 좋아할 것 같아서 맛키에게 연락했어. 맛키가 보호자 있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사이 이야기 했어.”
“그 의사 말인가.”
“맛키도 기억 안 나는 거구나? 하긴. 응. 오이카와 씨랑 고등학교 때 같은 배구부였어. 지금은 내과 전문의사야. 그래서 맛키가 많이 도와줬어.”
“며칠이나 병원에 있었지?”
“나흘째야. 진짜 어디 큰일 난 줄 알고 엄청 걱정했어. 큰 외상은 없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냥 좀 우시와카 쨩이 힘드니까 또 그래서 그런 건가 했는데….”
“또?”
우시지마는 자신이 기억하는 자신의 과거와 오이카와가 말하는 자신의 과거가 너무나 달라 혼란스러웠다.
“우시와카 쨩 오래 잘 때가 있어. 의사가 도피증세라고 했다고 했어. 우시와카 쨩은 원래 규칙적인 생활 했으니까. 첨엔 만 하루를 꼼짝도 안 하고 자서 놀랐는데 의사가 그랬다고 말해줬어. 그래서 그냥 가볍게 부딪친 건데 잠든 건가 했단 말이야. 사흘 쯤 되니까 큰일인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이럴 거라곤….”
오이카와의 말을 조합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만 늘어갈 뿐이어서 우시지마는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오이카와가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같았다. 도피성으로 만 하루를 넘게 잔다는 건 자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피라니, 이해할 수 없군. 내가?”
“어쩔 수 없어. 우시와카 쨩. 다들 이해하고 있어.”
“네 말을 더 이해할 수가 없다. 오이카와. 날 지금 다른 사람과 착각하는 것 아닌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제대로 말해라. 왜 내가 그런 거지? 어째서?”
“우시와카 쨩은 지금 배구 못 하니까.”
“…뭐?”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온 거야. 오이카와 씨랑 같이 살던 초반만 해도 불안증세가 좀 있었어. 그래도 많이 좋아졌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어….”
“배구를 못 한다고…?”
“우시와카 쨩 이 이야긴 별로 안 하고 싶어 하잖아.”
“내가?”
“우시와카 쨩….”
“배구를, 지금 배구를 못 한다는 건가?”
=========== 중략 ===================
오이카와는 한동안 우시지마를 올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방으로 들어가며 “저녁은 파스타로 괜찮아?”라고 물어서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여기저기서 베이컨이며 양파 치즈 토마토홀 캔 같은 것들을 꺼냈다. 그 재료를 보자 우시지마는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혼자 살며 종종 만들어 먹었던 파스타가 생각났다. 팀 동료의 부인이 알려준 것으로 면을 따로 삶지 않아도 돼 편했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만들던 방식 그대로 파스타를 만들었다. 이십여 분만에 파스타 두 접시가 완성되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식탁으로 옳기며 우시지마를 불렀다. 우시지마가 자리에 가서 앉자 오이카와는 냉장고에서 올리브를 꺼내 담고 우시지마에게 우유 한잔을 부어주었다. 그리고 조금 전 뚜껑만 따고 거의 마시지 않은 탄산수 병을 거실 테이블에서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양파를 많이 넣은 토마토 파스타에 파마산 치즈를 잔뜩 갈아 얹고 거기에 우유 한 잔. 요리를 거의 할 줄 모르는 우시지마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우시지마가 그 앞에서 눈을 깜박이고 있자 오이카와는 포크로 면과 치즈를 뒤섞으며 빨리 먹으라고 재촉했다.
그제야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처럼 포크로 면을 뒤섞어 입으로 가져갔다. 특별할 것 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파스타에서는 몹시 익숙한 맛이 났다. 익숙함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절실했던지. 우시지마는 그제야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 같았다. 그걸 숨기기 위해 얼굴을 찌푸리자 오이카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별로야?” 라고 물었다. 우시지마는 고개를 저으며 면을 가득 떠 입안에 밀어 넣었다. 우습게도 이제야 정말 여기가 자신이 사는 집이라는 실감이 났다.
“맛있군.”
“당연하지. 오이카와 씨가 만든 건데.”
오이카와는 피식 웃으며 우시지마와 마찬가지로 면을 말아 입에 넣었다. 그 뒤로 대화 없이 묵묵히 식사를 하는 두 사람 사이에는 식기가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하지만 어딘가 날서있던 긴장감은 한층 누그러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오이카와가 설거지를 했다. 계속 식탁 의자에 앉아 그런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보던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정리를 마치고 싱크대에서 떨어지자 입을 열었다.
“집안일은 네가 하는 건가?”
“아니. 오늘은 오이카와 씨가 봐준 거야. 평소엔 오이카와 씨가 밥 하면 우시와카 쨩이 설거지하고, 우시와카 쨩이 밥 하면 오이카와 씨가 설거지 하고 하는 거지 뭐. 근데 같이 집에서 밥 먹는 일이 잘 없어서 그냥 서로 자기가 먹은 건 자기고 치우고 그래.”
“그런가.”
“응.”
“그렇군.”
“내일부턴 원래대로 하는 거다?”
“…그러지.”
“뭐야. 불만이야?”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
“그래. 우시와카 쨩 차 다시 끓여줘?”
“음? 아니. 그냥 마시겠다.”
거실 소파로 다시 자리를 옮긴 우시지마는 이번엔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차는 간신히 미지근할 정도로 식어 있어 우시지마는 그것을 물마시듯 삼켰다.
“내가 배구를 그만뒀다고 했지?”
“응.”
“그럼 난 현재 뭘 하지?”
오이카와는 작게 한숨을 쉬며 아까처럼 1인용 소파에 자리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로드워크를 해. 여기서 북쪽으로 세 블럭 가서 길 건너 왼쪽으로 쭉 가면 공원이 하나 있거든. 거길 두세 바퀴 뛰고 돌아와. 그리고 집에 와서 점심 먹고. 아까 큰길가에 스포츠 센터 봤지? 거기 가서 수영이랑 헬스 같은 거 해. 갔다 와서 내키면 집안 일 하구 아니면 그냥 누워 있다가 저녁 먹고 다시 로드워크나 센터 가.”
“…그것뿐인가?”
“그나마도 좋아진 거야. 처음에 일본에 돌아왔을 땐 그냥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다구. 사람도 안 만나고 그래서 세미 쨩이랑 시라부 쨩이랑 엄청 걱정했잖아. 결국 작년엔 상담도 받으러 다니고 운동도 재대로 다시 시작하고 해서 나아졌어. 평생을 운동바보로 살았는데 우시와카 쨩이 이제 와서 다른 걸 뭐 하겠어? 넘 무리하지 말라고 해도 말도 안 듣구. 그래도 암 것도 안 하는 것보단 운동이라도 열심히 하는 게 나으니까 나도 별 말 안 했지.”
“흠….”
“우시와카 쨩이 생활비 걱정을 할 거야 뭘 할 거야.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제일 좋은데 상실감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깐….”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이야기를 듣자 시야가 단숨에 좁아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똑같이 운동으로 하루를 보낸다 해도 팀을 이루고 성적을 내기 위해 고심하는 생활과 단조롭게 몸을 움직이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자신은 그런 단조로운 생활을 한다고 했고 그것은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그럼 앞으론 뭘 하려던 거지?”
“글쎄. 우시와카 쨩은 미주알고주알 말 많은 타입이 아니잖아. 오이카와 씨가 물어도 별로 대답도 없는 걸.”
“그런가….”
“맛키가 넘 초조해하지 말라고 말해줬지? 내일 눈 뜨면 짜잔~ 하고 전부 기억 날 수도 있으니까 심각하게 고민하지 마.”
“넌….”
“응?”
“괜찮은 건가?”
자신에게 닥친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옆을 돌아보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오이카와 역시 우시지마와 마찬가지로 날벼락일 게 분명했다.
“말 했잖아. 우시와카 쨩은 오이카와 씨한테 또 반할 거라구.”
“하지만….”
“안 괜찮다고 달라지는 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쉬고 있어. 오이카와 씨는 한 바퀴 돌고 올게.”
우시지마는 같이 가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그것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진짜 괜찮은지 잘 모르잖아. 좀 쉬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오이카와는 현관에서 가까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시지마가 앉은 자세 그대로 그곳을 보고 있자 잠시우 가벼운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오이카와가 밖으로 나왔다.
“우시와카 쨩, 뭐 사다줘?”
“아니, 괜찮다.”
“응. 약 잘 챙겨 먹고 있어. 다녀올게.”
“알았다.”
오이카와는 이내 현관문을 열고 사라졌다. 우시지마는 참고 있었다는 듯 터져 나온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곳이 자신의 집인 건 의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결된 것은 없었다. 그나마 당장 해명을 해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지만 그런 사람이 없다는 건 또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자신이 스물여섯이라면, 이곳이 이탈리아라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그 사실이 경기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느라 다른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게 뻔했다. 그런데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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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줘. 우시와카 쨩.”
우시지마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방문 쪽에 있는 스위치를 내리기 위해 일어서려 하자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의 티셔츠를 뒤에서 잡아당겼다. 그대로 우시지마의 몸을 침대에 눕히더니 그 위로 올라타듯 상체를 겹쳐 사이드 테이블 위의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곧장 이불안으로 들어가 조금 전처럼 우시지마에게서 등을 보이고 누웠다.
우시지마는 그대로 캄캄해진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창문에 쳐둔 커튼 틈으로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뒤론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배구를 못한다. 3년이 넘는 시간동안 끊임없이 그 일을 반복해서 되새겼을 거란 생각이 우시지마의 머릿속에 물밀 듯 밀려들었다. 생각을 떨치듯 두 눈을 질끈 감았으나 상념은 깊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잠이 들기는커녕 점점 더 정신이 또렷해져갔다. 가만히 누워있는 것뿐인데도 심박 수가 올라가는 듯해 우시지마는 숨을 골랐다. 주먹을 힘껏 움켜쥐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배구를 못 한다니. 납득할 수 없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져 우시지마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경 쓰여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잠…. 안 와?”
“….”
“차 한 잔 마실래?”
“….”
우시지마는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오이카와는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발치로 몸을 이동하더니 침대에서 내려가 슬리퍼를 찾아 신고 밖으로 나갔다. 타박타박. 오이카와의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조용한 실내에는 문 너머 오이카와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소리로 가득 찼다. 전기주전자에 물을 붓는 소리, 달칵 하고 스위치를 올리는 소리. 찬장을 여는 소리와 거기서 꺼낸 차통이 싱크대에 맞부딪치는 소리. 차통을 열었다 닫는 소리와 컵을 꺼내는 소리. 잠시 후 물이 끓는 소리도 들렸다.
물이 끓고 주전자에서 전원이 차단되는 소리가 들린 후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이 적당히 식을만한 시간이 지나자 머그컵 가득 물을 붓는 소리가 들렸다. 최근 사용한 컵은 근처 베이커리에서 연말이벤트라고 천 엔 이상 빵을 사면 주었던 컵으로 민무늬 컵에 녹색으로 상호만 적힌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우시지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상호가 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척 최근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동안 밖이 조용했다. 잠시 후 티백을 버리는지 조금 무거운 것이 비닐봉투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오이카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사이드테이블 위에 잔을 놓으며 스탠드에 손을 대자 연한 오렌지색 조명등이 켜졌다. 오이카와는 침대로 올라오지 않고 그대로 걸터앉았다.
“너무 억지로 자려고 해도 안 좋대.”
우시지마는 눈두덩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끌어 침대 헤드에 기대앉자 오이카와가 베개를 등에 받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시지마는 고맙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흰색 민무늬 컵에 녹색으로 상호가 적혀 있었다.
“왜 그래?”
“…이 컵…. 기억이 나는 것 같다.”
“그래? 다른 건?”
“…연말에 천 엔 이상 구입하면 사은품으로 증정했던 것 같은데…. 맞나?”
“응! 맞아. 작년 연말에 이벤트 했어. 그래서 그날 우시와카 쨩 식빵을 두 봉지나 사왔다니까? 오이카와 씨도 우시와카 쨩도 바빠서 냉동실에 넣는 걸 잊어버려서 한 봉지는 그대로 버렸지만 말이지. 거봐. 맛키가 그랬잖아. 그냥 좀 지나면 다 기억 날 거야.”
“…그런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제대로 기억해냈다는 것을 확인받자 우시지마는 안도했다.
“너무 고민하지 말구. 차 마시고 자자.”
“넌?”
“자기 전에 차 마시면 자다가 화장실 가고 싶어져서 싫어.”
“그렇군.”
우시지마는 컵을 들어올렸다. 저녁에 마신 것과는 다른 향이 났다.
“이건….”
“녹차도 카페인 들어 있어서 넘 많이 마시면 안 좋다고 세미 쨩이 준 거잖아. 밤엔 그거 마시라구. 이거저거 섞은 허브티라고 했어.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하든데?”
“그렇군.”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일부러 차를 우려 온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우시지마는 한 모금 차를 머금었다. 덖지 않은 식물의 풋내와 익숙하지 않은 향이 입안에서 섞여들었다. 우시지마가 차를 마실 동안 오이카와는 말없이 우시지마를 보고 있었다. 우시지마도 딱히 할 말이 없어 그 시선을 보지 못한 척 그저 묵묵히 차를 마셨다.
잔이 반쯤 비워졌을 때 우시지마는 잔을 내려놓았다. 오이카와는 가벼운 어조로 “더 안 마시구?”라고 물었지만 우시지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별 말 하지 않고 침대로 올라갔다. 벽을 향해 누웠던 오이카와가 몸을 뒤척여 똑바로 눕더니 고개만 돌려 우시지마를 보았다.
“잘 자. 우시와카 쨩.”
우시지마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그대로 입을 닫았다. 오이카와는 입술만 끌어올려 웃고는 다시 돌아누웠다. 헝클어진 뒷머리카락이 낯설어서, 잘 자라는 인사를 돌려주지 못해서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자리에 누웠다. 스탠드 불을 끄고 베개에 머리를 바로 뉘었다. 하지만 허브티 정도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단지 옆에 누운 사람이 자신을 신경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아 가만히 누워있었다. 잠시 후 오이카와의 얕고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우시지마는 몸을 뒤척였다.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한참을 뒤척이다 창밖이 어슴푸레 밝아져 올 때쯤 잠들 수 있었다.
“우시와카 쨩. 일어나 봐. 우시와카 쨩.”
우시지마는 자신을 부르는 오이카와의 목소리와 어깨를 흔드는 그의 손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수면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인지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반쯤 뜬 눈으로 오이카와를 돌아보자 그제야 어깨를 놓아주었다.
“깨워서 미안한데. 나 나가봐야 해서. 혼자서 괜찮겠어?”
“…괜찮다.”
“열쇠는 신발장 옆에 걸려있어. 센터 회원카드는 지갑에 있으니까 갈 거면 챙겨가구. 아침은 안 차려줘도 괜찮지?”
“신경 쓰지 마라.”
“오늘 오이카와 씨 늦게 올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전화 꼭 해야 해? 휴대폰에 오이카와 씨 번호 입력 해놨어. 어디 아프면 꼭 연락해. 알았지? 약 잘 챙겨 먹고, 병원 가서 맛키가 이상한 소리 하면 연락하구.”
“괜찮다.”
“정말?”
“괜찮으니 볼 일 보러 가라. 난 좀 더 잤으면 한다.”
“응.응. 평소엔 안 깨우고 가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이러니까…. 그럼 다녀올게.”
우시지마가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오이카와는 여전히 그런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나 싶어 오이카와를 주시하는데 갑자기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의 양쪽 뺨을 손으로 감쌌다.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뜨는 우시지마의 코앞에 오이카와의 얼굴이 다가왔다.
“….”
“다녀올게.”
소리도 없이, 가볍게 입술과 입술이 마주 닿았다. 우시지마가 그대로 얼어붙어 반응을 하지 못하는 동안 오이카와는 몸을 일으켜 다시 한 번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나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오이카와의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았다.
기억에 없는 오이카와의 입술은 부드럽고 조금 따듯했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난 후에도 한동안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있던 우시지마는 문득 한숨을 내쉬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방금 전 오이카와의 행동으로 잠이 다 달아났지만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두껍지 않은 커튼을 통해 창밖의 빛도 잠을 방해했다. 우시지마는 왜 좀 더 두꺼운 커튼이 아닌 것인지 원망스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정도 두께면 적당하다는 거 같던데.』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대사 때문에 우시지마는 눈을 가늘 게 떴다. 아마 세미가 말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떡 몸을 일으켜 창문 앞으로 갔다. 베이지색의 민무늬. 커튼자락을 만지는데 뒤이은 세미의 말이 생각났다. 『커튼 달고 청소 하면 초대해. 맛있는 거라도 사들고 갈게.』라는 세미의 말에 자신을 고개를 끄덕였던가 그렇지 않았던가. 그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어제는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할 것 같더니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걸 보면 하나마키의 말처럼 일시적인 현상인 것 같기도 했다. 우시지마는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몸을 다시 눕히는 대신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방문을 나서다 말고 도로 돌아온 그는 이불을 걷어 침대헤드에 걸고 창문의 커튼도 걷었다. 잠시 망설이다 창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들이닥쳤다.
주방으로 가자 개수대에는 차가 반쯤 단긴 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특별한 무늬 없는 흰색에 녹색 글씨가 있었다. 본인이 쓴 컵이면 좀 씻어두고 가면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하며 우시지마는 찬장을 열었다. 단백질 보충제와 스프 캔이 있겠지. 라고 생각한 곳에 둘 다 있었다. 그것들을 꺼내 오프너를 찾았다. 바로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자신이라면 이쪽 서랍에 넣어두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곳을 열자 역시 그곳에 들어있었다. 작은 냄비를 꺼내 내용물을 쏟아 붓고 가스 불을 켰다.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 캔을 반쯤 채워 흔들어 그것을 냄비에 부었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 가공식품이 짜다고 불만을 말하는 우시지마에게 팀 동료가 자신의 중국인 친구도 그래서 우유를 넣는다며 알려준 방법이었다. 스푼으로 냄비 안을 휘저은 후 스푼을 캔에 꽂아두고 건조대에 있는 셰이커에도 우유와 단백질 보충제를 넣고 흔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단숨에 들이켠 다음 셰이커를 개수대에 넣고 식탁을 돌아보았다. 식빵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어 우시지마는 이번엔 냉동실 문을 열었다. 냉동된 것을 먹기 싫어서 냉동실에 빵이 있어도 새것을 사오던 습관은 오이카와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했는지 식빵이 두세 장씩 든 채 묶인 비닐봉지가 냉동실에 몇 개나 있었다. 손에 닿는 봉지를 꺼내 접시에 옮겨 담고 분명 오븐기능이 있을 전자레인지 문을 열었다. 오븐기능으로 데우기를 선택하고 냉장고를 다시 열어 우유를 제자리에 집어넣고 사과를 하나 꺼냈다. 물로 씻어 닦지도 않고 손으로 반을 갈랐다. 반쪽은 접시 위에 두고 반쪽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당연하게도 무척 차가웠다. 사과를 씹으며 현관으로 간 우시지마는 종이신문을 구독하는 자신의 습관이 여전함을 다시 확인했다. 오이카와가 나가며서 집안에 던져둔 듯한 신문을 들고 식탁으로 돌아와 사과를 먹으며 신문을 펼쳤다. 자신이 기억하는 년도보다 3년이 더 흐른 후의 날짜가 상단에 찍혀 있었다.
정독한다기보다 표제를 훑는 정도로 신문을 보는 사이 스프가 끓고 빵이 데워졌다. 스푼으로 냄비 바닥에 눌러 붙은 것까지 긁어 그릇에 담아 식탁으로 옮기고 빵도 꺼냈다. 그다지 식욕이 당기진 않았지만 자리에 앉아 그릇을 들어 스프를 마셨다. 그릇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부분이 입안을 거칠게 맴돌아 다시 스프를 마셨다. 먹고 마시고. 몇 번 반복하는 것만으로 식기가 비워졌다. 남은 사과 반쪽을 먹으며 다시 신문을 훑었다.
3년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달라진 것은 총리 이름뿐인 자국의 정치 기사는 우시지마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과 비슷했다. 침체된 경기에 대한 기사, 산불에 대한 기사, 의료사고에 대한 기사도 있었다. 약물의 오용으로 내과 수술을 받은 환자가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곧 다가올 벚꽃시즌의 개화시기에 대한 기사와 유명한 벚꽃 관련 관광지의 예상 방문자수라든가 올해의 꽃놀이 도시락 추천 매장 따위의 기사도 있었다.
연예기사는 그냥 넘기고 스포츠 면으로 넘어갔다. 곧 개막하는 퍼시픽리그의 분석기사로 가득 차있었다. 역시 일본에선 야구가 인기 있는 스포츠임을 실감하며 종이를 넘겼다. 몇 장 넘기자 다음 주면 시즌이 끝나는 배구관련 기사가 보였다. 이미 챔피언결정전에 들어갔고 오이카와가 있는 팀이 후보 중 하나였다.
날짜를 보니 그제, 우시지마가 병원에서 깨어난 날에 결정전 두 번째 경기가 있었다. 바빴을 텐데 병원으로 와준 걸 알게 되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정표를 보자 오늘도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첫 경기는 오이카와의 팀이 승리했고 그제 경기는 패했다. 기사는 양 팀을 분석한 기사가 대부분이었는데 오이카와가 찍힌 경기 사진도 있었다.
예전에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기량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함께 배구를 한다면, 우시지마 자신이 세터에게 가장 필요한 스파이커일 테니 그의 재능도 자신의 재능도 더 높은 곳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우시지마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고등학교를 졸업 후 다시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우시지마의 방식대로, 오이카와는 오이카와의 방식대로. 그렇게 다른 길로 향했다. 우시지마가 국가대표였을 때 오이카와는 아니었기 때문에 국제 대회에서 한 코트에 설 일고 없었다.
스물다섯 생일이 되는 날 어머니의 호출로 잠시 일본에 들어왔었다. 그때 연이 닿아 오이카와를 만났고 당연하게도 배구 이야기를 했다. 체감 상으로는 채 1년이 되지 않는 시간인데 실제로는 벌써 4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서인지 아니면 이것도 기억을 못하기 때문인지 구체적으로 무슨 대화를 했는지에 관해선 명확하게 생각나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신문을 도로 접어 다용도실로 가지고 갔다. 며칠 내놓지 못해서인지 쓰레기가 조금 쌓여있었다. 신문이 쌓인 곳엔 우시지마가 보지 못한 며칠분의 신문이 한 번도 펼친 적이 없는 상태로 제일 위에 겹쳐져 있었다. 그곳에 신문을 놓으며 오이카와가 옮겨뒀을 거라 생각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시지마는 신문을 정독하는 쪽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그날 신문을 보지 못하면 미련 없이 그것을 버렸다. 읽지 않은 신문이 저기에 있다는 건 오이카와도 그 사실을 안다는 말이었다. 신문을 그 위에 놓고 돌아 나오며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이 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을 자신이 점점 더 확신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가볍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는 건 그에 준하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우시지마는 생각했다. 오이카와와 함께 밥을 먹고 그와 같은 침대에 눕고, 또 그와 키스를 하고….
우시지마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술을 만졌다. 오이카와의 입술은 부드러웠던가 거칠었던가. 그가 눈을 감았나 떴나. 조금 전 일이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건 기억이 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놀라서, 오이카와와 제가 입맞춤을 나누는 것이 일상인 관계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와 닿아 그랬다.
동성과 키스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거나 불쾌함을 느끼기보다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던 오이카와와 먼저 입술을 맞닿아 왔다는 사실이 놀랍고 의아했다.
입술에서 떨어진 손이 이마를 짚었다. 절로 한숨이 나와 우시지마는 고개를 내저으며 주방으로 돌아와 사용한 식기를 개수대로 옮겼다. 설거지를 끝내고 식탁을 정리하고 물을 끓이며 찬장을 열었다. 몇 개의 차통과 알루미늄 봉투가 있어 우시지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검정바탕에 진회색 줄무늬가 들어간 것과 빨간 바탕에 노란 꽃이 그려진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이 원하는 것일 듯했다. 가장 문에 가까운 곳에 놓여있어서기도 하지만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다. 잠시 망설이다 빨간 통을 집어와 뚜껑을 열자 익숙한 녹차향이 났다.
언제부터 티백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티백이 편하다고, 뜨거운 물을 담은 머그컵에 티백을 넣으며 우시지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늬 없는 하얀 바탕에 녹색 글씨. 어딘가의 상호 같은데 오이카와가 가져온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우시지마는 티백을 꺼내 버리고 컵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때 어디선가 짧은 벨소리가 났다. 한참 찾아 어제 입었던 상의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자 오이카와에게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병원 꼭 가!’ 라는 한마디에 답장을 하지 않고 화면을 껐다. 그러다 수 초 후 다시 화면을 켜 또 다시 수 초를 망설인 후 답장을 보냈다. ‘다녀오겠다.’ 그리고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 그 두 마디를 입력하는 일이 무언가 큰 숙제라도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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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물을 틀어놓은 채 꽤 오랜 시간 욕실에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발갛게 익은 오이카와는 지쳤다는 듯 알몸에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 쓴 채 슬리퍼를 끌고 터덜터덜 침실로 돌아와 침대위에 풀썩 쓰러졌다. 우시지마도 오이카와와 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오이카와의 뒤를 따라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머리 말려줘. 우시와카 쨩.”
뜬금없는 소리에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돌아보자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있던 오이카와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 말려줘.”
하나마키의 말대로 오이카와는 어리광을 부리는 게 익숙해보였다. 이런 것들도 일상이었던 것인가를 생각하며 우시지마는 다시 욕실로 가 드라이어를 가져왔다. 연인이라면 이런 스킨쉽도 특별할 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탈리아에서 꽤 화려한 금색으로 염색을 하고 다니던 그리스 국적의 여자를 사귄 적이 있는데 그녀도 잠자리를 가진 언제 한 번 우시지마에게 머리카락을 말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한겨울이 아니면 드라이어를 쓸 일이 없는 우시지마가 여성의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릴 수 있을 리 만무했고 그녀는 손재주가 너무 없는 것 아니냐고 불평 하며 결국 드라이어를 빼앗아 자기 손으로 머리를 말린 후 그것으로 우시지마의 머리카락을 일부러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일을 떠올리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길이로 치자면 우시지마와 거의 비슷한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말리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을 테고 과거에 경험이 있다면 운전과 마찬가지로 몸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콘센트를 꽂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이카와는 비척비척 몸을 돌려 목을 죽 내밀더니 우시지마의 허벅지에 자신의 얼굴을 얹었다. 우시지마는 드라이어의 전원을 넣어 뜨거운 바람으로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에 밀어 넣고 바람을 쏘이자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점점 보슬보슬하게 변해갔다.
“뜨거워…. 우시와카 쨩….”
허벅지에 댄 입술을 우물거리며 불만을 말해 우시지마는 손을 조금 멀리 떼어냈다. 뒷머리카락에서 시작해 정수리와 옆을 얼추 다 말리고 드라이어를 끄자 오이카와가 몸을 일으켜 우시지마의 손에 든 것을 빼앗아 그의 등 뒤로 가 무릎을 대고 서 머리카락을 말려주기 시작했다.
“오이카와 씨는 이렇게 해주는 게 좋아. 살살 만져주다가 두피도 꾹꾹 누르구. 어때?”
“그냥 말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휴. 내가 말을 말지.”
오이카와는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긴 손가락이 모근을 부드럽게 흔들다 두피를 마사지하고, 점점 내려온 손이 뒷목의 근육을 자극했다.
“…시원하군.”
“우시와카 쨩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긴장했나봐. 어깨가 돌덩이네. 마사지 받으러 갈래? 오이카와 씨가 잘 하는 곳 아는데.”
“그 정도는 아니다.”
“그래? 영 안 좋으면 나중에 말해.”
“알았다.”
오이카와는 다시 우시지마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끝!”
드라이어를 끄고 콘센트를 뽑아들고 두 사람이 사용한 수건을 수거한 오이카와는 들어올 때보단 가벼워진 걸음걸이로 침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것들을 정리 한 후 주방으로 들어간 오이카와가 움직이는 소리와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차를 한 잔 우려와 우시지마에게 내밀었다. 세미가 보내준다는 그 허브티였다.
“너는?”
“화장실 가고 싶어져서 안 마신다니깐.”
옷을 찾아 입고 침대에 기대앉은 우시지마와 달리 알몸 그대로 돌아다니다 침실로 들어온 오이카와는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차가 좀 더 식길 기다리던 우시지마가 그 슬리퍼를 보고 입을 열었다.
“저게 내 것 아닌가?”
“뭐? 슬리퍼? 어차피 사이즈는 똑같은 거잖아. 그리고 연녹색이 오이카와 씨 거라구. 우시와카 쨩이 골라준 거란 말이야.”
“그런가.”
“응.”
“그렇군.”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우시지마는 차를 마셨다. 오이카와는 이불안으로 들어가 몸을 반쯤 접어 우시지마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우시지마의 손이 자연스레 오이카와의 뺨에 닿았고 오이카와의 손이 그 커다란 손을 가만히 덮었다.
닿는 것조차, 아니 옆에 앉는 것조차 어색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맞닿은 곳에서 느껴지는 오이카와의 체온이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몸을 섞는 일은 확실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짧은 시간에 좁혀주었다. 우시지마는 차를 마시며 오이카와의 부드러운 뺨을 쓸어내렸다. 오이카와는 그런 우시지마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입가에 닿은 검지 끝을 살짝 입술로 물었다.
잔이 반쯤 비었을 때 우시지마는 그것을 사이드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침대에 누웠다. 우시지마가 몸을 바로 뉘는 동안 조금 떨어져 옆으로 누워있던 오이카와가 우시지마를 빤히 보았다. 우시지마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는 오이카와를 마주보다 팔을 뻗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으며 우시지마의 품으로 들어왔다. 팔을 베고 누워 우시지마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손을 허리 위로 올렸다. 우시지마는 옆으로 돌아누워 오이카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이카와는 그런 우시지마의의 품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계기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분명 자신은 오이카와를 이렇게 안아주었을 거라 생각하며 우시지마는 팔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코끝에 닿는 머리카락에서 자신과 같은 샴푸 냄새가 났다. 손바닥에 닿는 오이카와의 맨살이 부드러웠다. 기억이 나지 않는 일들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찬 머릿속이 정사 후의 나른한 만족감으로 채워졌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정수리에 입술을 대며 그곳에 코를 파묻었다. 하나마키의 말대로 오이카와가 있어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일찍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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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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