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자정, 오늘
발간일 : 2017년 05월 21일 마츠오이 배포전 '마츠오이 결혼 조작단'
커플링 : 마츠카와X오이카와 (R-19)
※ 책 사양
신국판 인쇄 100페이지 내외
표지 일러스트는 섶님(@seoooop)께서 그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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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0원
※ 주의사항
● 성인이신 분들에게만 판매합니다.
● 살짝 스릴러 느낌을 내보려고 했는데 그냥 두 사람의 권태기 극복기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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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자정, 오늘.
문득 손에 열이 올랐다.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마츠카와는 흘끔 시선을 위로 옮겨 스마트폰 화면 상단 배터리 칸을 확인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배터리 이미지는 잔량이 절반도 남지 않았음을 표시하고 있었다.
충전할까 말까 고민한 것도 잠시, 배터리 잔량이 더 줄어들면 아예 폰에서 손을 놓는 것으로 결정한 그는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원래라면 그냥 나쁘지 않아 보이는 곳을 선택했을 텐데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아 여러 가지 조건 들을 머릿속에서 나열하며 비교하자니 손이 아니라 머리가 열이 올라 터질 것 같았다.
마츠카와는 이런 여행 계획을 저 혼자 짜본 적이 없었다. 이런 세세한 일들은 언제나 오이카와의 몫이었다. 딱히 마츠카와가 오이카와에게 일을 미루었다기보다는 오이카와가 마츠카와를 미더워하지 않아 스스로 처리한 탓이었다. 오이카와의 계획은 대체로 합리적이라 마츠카와가 첨언할 것이 없어 그는 언제나 오이카와의 결정을 군말 않고 따랐다. 마츠카와는 계획 세우는 일에 서툴고 오이카와는 그 일을 즐겨 하고 능숙하니 자연스럽게 누군가 정하지 않아도 오이카와가 계획이 필요한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츠카와가 그 상황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맡기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보통 힘쓰는 일은 자진해서 했다. 오이카와가 짜온 일정에 토를 달지도 않았고 어지간해서는 힘들다거나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것이 두 사람의 역할분담이라고 한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마츠카와의 생각일 뿐이었다. 몇 주 전 오이카와는 “한동안 맛층이랑 여행 안 갈래.” 라고 말했다.
소파에 누워 폰을 보던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뜬금없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오이카와는 마츠카와를 돌아보지 않고 바닥에서 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정면을 보고 있었다. 마츠카와는 그게 약간의 투정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폰을 보며 물었다.
“왜?”
“미안해서.”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몸을 일으켰다.
“편의점 다녀올게.”
그런 통보를 남기고 오이카와는 밖으로 사라졌다. 가는 걸 붙잡고 뭐가 미안하냐고 물어봐야 했다. 하지만 그날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행동을 보며 피로를 느꼈다. 마츠카와라면 눈치챌 테니 내가 왜 기분이 나쁜지 잘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에 오이카와의 기분을 헤아리기보다 먼저 자신의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쫓아가지 않았고 메신저로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나 양치질을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실제로 쓰는 일이 없어 이사 온 첫날부터 옷걸이 신세인 침대 위의 옷가지를 대충 던져두고 이불도 없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런 행동이 상당히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마츠카와는 다시 거실로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만큼 더 그랬다.
그에 따른 대가가 적지 않음을 알면서도 당장의 비뚤어진 마음을 따라 행동했고 아니나다를까 예상했던 냉전이 찾아왔다. 오이카와는 편의점에 다녀와서 마츠카와가 소파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함께 잠을 자는 오이카와의 방을 확인한 다음 현관으로 갔다가 마츠카와의 방으로 왔다. 방문을 완전히 닫은 것도 아닌데 오이카와는 곧장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하는 거겠지. 마츠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누운 채 폰을 들여다보았다. 몇 초 후 문이 열리고 오이카와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맛층, 자?”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전혀 짜증이 묻어나지 않은 평소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마츠카와는 그런 오이카와의 태도야말로 굉장히 기분이 상했다는 표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마츠카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폰을 손에 쥔 채 슬쩍 시선만 돌려 오이카와를 보며 말했다. 오이카와는 입술 끝만 끌어올려 웃었다.
“그래? 그럼 오뎅 먹을래? 맛층 생각나서 몇 개 더 사 왔어.”
“별로…. 안 땡겨.”
오이카와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츠카와는 거절했다. 오이카와는 다시 묻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오이카와가 움직이는 소리와 오이카와가 꺼낸 음식물 냄새가 넘어왔다. 마츠카와는 모르는 척 폰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마츠카와는 그대로 잠들었고 그날 이후 예상대로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누구도 화를 내지 않았고 특별한 어떤 일도 없었다. 마츠카와는 그런 집안 공기가 답답했으나 이렇게 될 것을 알고 행동했던 것이니 한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답답함이 더해갔다. 아무리 본인이 자처한 일이라고 해도 단순히 약간 피곤해서 한 행동이지 오이카와와 이대로 심각한 문제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마츠카와는 그 나름대로 관계개선을 위한 행동을 취하려 했다. 그러나 오이카와가 눈에 보이게 마츠카와를 무시하고 있어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마츠카와는 고심하다 오이카와와의 휴가를 결심했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가 들으라는 듯 하나마키와 통화하며 휴가 날짜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계획이 아직 없다는 말도 했다. 마츠카와는 그것이 오이카와 자신에게 관계개선의 여지를 주려 한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오이카와의 휴가 전에 화해 -화해할 일인지 모르지만- 한다면 어딘가 여행을 가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편한 마음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될 듯했다.
오이카와가 그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겠지만 마츠카와는 이번에는 그저 기다리는 것보다 무언가 먼저 해주고 싶었다. 좀 조용한 곳을 가고 싶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언제나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는 것을 선호해 휴양지보단 관광지 위주로 일정을 짜는 편이었다. 산이나 바다로 간다고 해도 그냥 산이나 바다를 보는 게 아니라 등반을 하고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쪽이었다. 마츠카와는 어떠냐고 하냐면, 그런 것을 그 역시 좋아하지만 때때로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늘어져 편히 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건 집에서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집과 생소한 장소는 다른 법이었다.
그래서 마츠카와는 이번에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보기로 했다. 오이카와가 마츠카와가 선택한 장소를 싫어하지 않을 거란 확신도 있었다. 관람보단 체험을 즐긴다 해도 오이카와가 마츠카와와 보내는 느긋한 시간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반드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오이카와는 몸을 움직이는 쪽을 택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지 않냐고 불쾌해하기보단 마츠카와가 오이카와와 함께 갈 곳을 스스로 물색하고 준비했다는 사실에 더 점수를 쳐줄 거라는 것도 마츠카와는 잘 알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스스로의 의지로 여행에 관련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패기롭게 시작한 건 좋은데 어디로 가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국내? 해외? 내륙? 바다? 리조트? 호텔 패키지? 온천 딸린 여관? 교통수단은? 막연히 오이카와와 함께 조용한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생각만으로는 골라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이럴 때 그냥 오이카와에게 물어보면 편하겠지만 이 상태에서 물어보면 괜히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말고 그냥 이번 연휴에는 집에 있자고 말할 게 뻔했다. 그리고 안 갈 거라고 해놓고 못 가게 된 원인이 마츠카와에게 있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겠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츠카와는 눈썹을 모아 여행상품을 살펴보았다.
연휴가 얼마 남지 않아 선택지가 많지 않았고 조용한 곳을 찾자 더 선택지가 줄어들었다. 마츠카와는 이것저것 살펴보다 객실에 온천이 딸린 여관을 가기로 했다. 범위를 줄이고 살펴보자 여관도 굉장히 많은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렴풋이 좋은 곳은 비싸겠거니 생각한 마츠카와를 비웃기라도 하듯 보는 것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여러 곳을 살펴본 끝에 되도록 개별 온천탕이 딸린 곳을 가기로 결정했다. 치료를 위해 가는 것도 아니니 대욕탕은 동네 대중목욕탕과 별다를 바 없을 듯해서였다. 남들 눈이 있는 곳에선 대화도 편하게 할 수 없기도 했고 색다른 장소이니 상대의 벗은 몸을 보면 무언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 곤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였다.
그런 마츠카와가 선택한 곳은 아오모리 현의 한 작은 마을에 있는 여관이었다. 오이카와와 마츠카와의 휴가 날에 지역 마츠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조용한 곳을 가고 싶다고 했으면서 결국 오이카와가 즐거워할 만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마츠카와는 이곳을 골랐다. 대신 온천은 마음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산 중턱에 자리한 곳으로 휴대전화나 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마츠카와는 자신이 스마트폰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였고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불평을 하리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예 인터넷을 쓸 수 없는 환경이면 보다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관계를 돌이켜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여관에서 인터넷을 쓸 수 없어 예약도 유선전화로 이루어졌다. 마츠카와는 예약하기 전에 오이카와의 의견을 물어봐야 하지 않나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이왕 이렇게 된 것 모든 걸 다 끝내고 이야기하자고 마음먹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마을에서 거리가 있는 만큼 마을에서 여관까지는 여관에서 픽업해주었고 원래 포함된 석식과 조식 말고도 추가비용을 지불하면 중식도 제공해주었다. 원한다면 그곳에 들어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여관은 산 중턱이라 가볍게 산책을 겸해 산을 오르내릴 수도 있었다. 마츠카와는 아무래도 연휴이니 예약이 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며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은 중년 여성은 상당히 친절한 목소리로 빈방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이틀 후 마츠카와는 거실 소파에 누워 게임을 하며 오이카와를 기다렸다. 근래에 그랬듯 오이카와는 집으로 들어와 마츠카와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마츠카와는 그런 오이카와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를 잠시 보더니 다행히 별다른 말없이 마츠카와 옆으로 와 앉았다.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눈을 보며 마츠카와는 마른 침을 삼켰다. 어쩐지 긴장이 되어 입술을 혀로 핥은 마츠카와는 뜸을 들이다 오이카와를 짜증 나게 하기 전에 자신이 세운 계획에 대해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의 말을 듣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나 왜 멋대로 계획을 세웠냐거나 그런 곳을 가기 싫다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여행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는 마츠카와가 이렇게 행동력을 발휘해 준비했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감탄한 듯했다. 무슨 꿍꿍이냐고 미심쩍어하는 말에 순수한 의도라고 설득하는 게 문제였지만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의 말을 전부 믿진 않아도 마츠카와가 여행을 계획했다는 점엔 점수를 높게 쳐주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마츠카와가 계획을 세우고 오이카와가 받아들였다고 해서 관계가 갑자기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마츠카와는 그 점 역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냉랭한 태도였는데 여행 가자는 한마디에 전처럼 태도가 변하는 건 오이카와에겐 이와이즈미에게나 가능할 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오이카와는 기꺼이, 라기보다는 노력이 가상해서라는 말이 어울릴 태도로 마츠카와와 함께 휴가길에 올랐다.
오이카와는 생각보다 더 먼 거리에 놀란 듯했지만 힘들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의외라는 눈을 했을 뿐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터미널로 가 미리 알아본 마을로 가는 버스표를 사려고 했다. 하루에 두 번 들어가고 두 번 나오는 곳이라 제대로 시간을 확인했는데 버스터미널에서는 그 마을로 가는 버스 시간표가 바뀌었고 30분 전에 출발했으며 다음 버스는 저녁 8시라고 했다. 마츠카와는 저도 모르게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제 고작 9시 반이었다. 황망한 얼굴로 매표소 직원을 보던 마츠카와는 결국 그가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음 받아들이고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아 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오이카와에게로 갔다.
분명 인터넷으로 확인한 시간은 오전 10시, 오후 8시였다. 이렇게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에게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사실을 들은 오이카와가 무슨 소리를 할지 걱정이 되었다. 평소 다른 사람을 대하는 오이카와라면 주저 없이 웃으며 돌발상황을 전부 대비할 수 있는 건 아니니 괜찮아. 이참에 주변을 둘러보면 되지! 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에게 타인보다 가까운 존재였다. 타인에게보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그건 두 사람이 그만큼 가깝기 때문이었다. 평소 마츠카와는 오이카와가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하고 자신에게 좀 더 기대는 걸 좋아했다. 오이카와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주어서였다. 물론 그 때문에 귀찮다고 생각한 나머지 사이가 소원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이카와가 자신을 타인처럼 대해주길 바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니 다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이런 여행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 일정이 처음부터 틀어졌다고 생각하자 마츠카와는 목구멍에 한숨이 차올랐으나 그는 오이카와 앞에서 한숨을 내쉴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그만큼 맡긴다는 의미였다. 배구를 할 때도 그랬지만 오이카와는 자신이 맡긴 일에 관해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하진 않았다. 단지 문제는 마츠카와가 타인보단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기분을 전혀 드러내지 않을 리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마츠카와는 한숨을 집어삼키고 오이카와의 옆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의 얼굴을 돌아보자마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을 겹쳐 꼈다. 추궁하는 말 대신 눈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마츠카와는 이럴 때 오이카와의 눈치 빠른 면이 곤혹스러웠지만 눈치채고 있는 만큼 체념할 수 있어 말을 빨리 꺼낼 수 있었다.
“버스 시간이 바뀌었대. 벌써 출발했다니까 다음 차는 8시.”
“8시?”
오이카와는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으니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이는 일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다 말고 한숨을 내쉬며 마츠카와를 향해 내밀었던 몸을 다시 등받이에 기댔다. 손을 들어 앞머리를 쓸어올린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분명 “이럴 줄 알았으면 맛층한테 맞기지 않았을 거야.” 라거나 “제대로 좀 하지그래? 이게 뭐야? 그때까지 뭐 하자구?” 라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오이카와가 마츠카와를 타인보다 가깝게 여기는 지표임은 알아도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던 마츠카와는 바짝 마르는 듯한 입안을 혀로 적셨다.
“갑자기 바뀌었다네.”
“그래서?”
“이 근처를 좀 돌아보면 되지 않을까? 역 주변이니까 뭐든 있겠지.”
“뭐든 있기야 하겠지.”
목소리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마츠카와는 그 말을 듣는 게 껄끄러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작은 버스터미널 안에 자리한 매표소 안 형광등이 깜박깜박 점멸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직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형광등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교환을 요청했으나 아직 처리되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마츠카와는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워 고개를 다시 돌렸다. “지금 딴 생각할 여유가 있어?” 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런데 곧장 오이카와는 한쪽 입술을 실룩이더니 눈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명백히 일부러 만들어낸 웃음이었다.
“뭐, 괜찮아. 맛층 탓이 아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주변 구경 하지 뭐. 여관에 픽업하는 거 밤으로 바꿔야 하지 않아? 여관에 전화하고 이 동네 한 바퀴 돌아보자. 코인 로커도 있네. 로커 비용은 맛층이 내줄 거지?”
마츠카와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괜찮은 게 아닌 건 알지만 이번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오이카와 그 나름의 표현임을 알아서였다. 마츠카와는 곧장 여관에 전화했다. 차 시간이 바뀌어서 늦게 들어가게 될 것 같아 죄송하다고 하자 전화를 받은 이는 온화한 목소리로 도리어 종종 그런 일이 있다며 이런 마을이라 죄송하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마츠카와가 너무 시간이 늦었으니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기 전에 시간이 애매할 테니 식사는 여관에서 하라고 하며 부담 갖지 말라고 말했다. 마츠카와는 감사하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말을 오이카와에게 전했다.
“그럼 나가자.”
마츠카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오이카와를 따라 일어섰다. 코인 로커 쪽으로 가자 역시나 낡은 코인 로커는 동전을 넣는 방식이었다. 가지고 있는 동전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마츠카와는 동전교환기를 찾았다. 고장이라는 안내판이 붙은 것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는 출구 쪽에 자리한 작은 매점으로 갔다. 레이스를 뜨는 노부인이 앉아있는 매점에서 그냥 동전을 바꿔 달라 하기도 그래서 마츠카와는 목이 마른 김에 물을 한 병 샀다. 노부인은 마츠카와가 내민 지폐를 받아 거스름돈을 돌려주며 마츠카와와 코인 로커 앞에 선 오이카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친구끼리 여행 왔나 봐요.”
“예….”
“요즘 이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오더라고요.”
“네….”
“어디 방송에라도 나왔나요?”
“글쎄요….”
적당히 대꾸하고 돌아서려는데 노부인은 무료함을 떨치기 위해서인지 마츠카와가 미적미적한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다음 질문을 했다. “얼마나 머물다 가나요?” 라는 질문에 “적당히….” 라고 대답하려던 마츠카와를 오이카와가 구해주었다.
“맛층. 뭐해?”
“아니….”
“두 사람, 친한가 봐요?”
마츠카와에게 다가온 오이카와는 노부인에게 되물었다.
“그렇게 보이나요?”
“친하지 않으면 함께 여행을 오지 않겠죠?”
“엄청 친하답니다.”
그렇게 말한 오이카와는 눈을 접어 생긋 웃었다. 예의를 지킬 때 여기까지 하자는 의사가 분명히 드러나는 그 웃음은 최근 마츠카와도 자주 보던 것이었다. 아주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노골적으로 대화를 단절하고 싶어 함을 알 수 있는 행동이지만 노부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오이카와와 똑같이 눈을 접어 웃었다.
“여행 와서 남보다 못해지는 경우도 많던데. 두 사람은 안 그랬으면 좋겠네요.”
오이카와의 눈매가 단번에 가늘어졌다. 마츠카와도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에게 시선으로 더 상대하지 말자는 뜻을 비쳤다. 오이카와 역시 마츠카와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코인 로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츠카와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고 오이카와 쪽으로 갔다.
코인 로커의 덜컹거리는 문이 미덥지 못했지만 별수 없으니 안에 가방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동전을 넣고 열쇠로 잠근 후 손잡이를 몇 번 당겨 잠긴 것을 확인한 마츠카와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기분 나빠.”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시선이 잠깐 다녀온 곳을 눈동자만 굴려 보았다. 그 노부인은 손으로는 무심히 레이스를 뜨며 계속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마츠카와도 기분이 언짢아졌지만 이번 여행은 자신이 주도한 만큼 오이카와의 기분에 맞춰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무 말 하지 않고 턱으로 출입문을 가리켰다.
“나가자.”
오이카와는 별말 없이 마츠카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오래된 목조 건물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늘어선 모양은 아무리 보아도 버스터미널 근처 같지 않았다. 터미널이라면 유동인구가 많을 테니 제대로 된 식당이라도 있을 법한데 딱히 눈에 띄는 곳이 없었다. 어딜 가야 하나 마츠카와가 고민하는데 옆에서 계속 폰을 보던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음…. 저기 중화 식당이 있나 봐. 적당히 라멘이라도 먹을까?”
“다른 건 안 나와?”
마츠카와는 오이카와가 말하자 비로써 지도 어플에 식당도 표시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인터넷에 이 동네 맛집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물었는데 오이카와는 일을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그렇게 바라는 게 많냐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검색 창을 열어 이 지역 이름을 검색했다.
“헤에….”
“왜?”
의외라는 반응에 마츠카와가 묻자 오이카와는 화면을 아래로 내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 생각보다 유명한 관광지인가 봐?”
“그래?”
“응. 생각보다 뭐가 많이 나오네. 여기 칭기즈칸 맛집 있대.”
“덥지 않을까?”
화면을 내려보던 오이카와의 손이 잠시 멈췄다. 입술을 꾹 닫은 그는 조금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면요리 전문점 가자. 여긴 아침부터 연대.”
“…그래.”
더 의견을 말했다간 “맛층이 찾지그래?” 라는 소리가 돌아올 것 같아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화면에 나타난 지도와 주변을 살펴 위치를 가늠하더니 앞으로 걸었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 옆에서 함께 걸었다. 주변이 소란스럽기라고 하면 좋을 텐데 공교롭게도 다니는 사람조차 많지 않은 이곳은 지나치게 고요하기만 했다. 마츠카와는 곁눈으로 오이카와의 표정을 삼키며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평소라면 이런 고민 같은 건 하지 않는데 자신이 이곳으로 오자고 한 이상 오이카와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두 사람의 상태는 아주 가느다란 실이 느슨해지는 법 없이 계속해서 팽팽하게 당겨진 형국이었다. 한쪽의 힘이 조금만 강해지면 실이 장력을 버티지 못하고 끊어질 확률이 높았다. 마츠카와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오이카와를 흘끔거렸다.
“맛층, 오이카와 씨한테 할 말 있어?”
제 그런 시선을 오이카와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마츠카와는 자신의 굼뜬 행동을 책망하며 애매하게 웃었다.
“아니.”
오이카와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제자리를 찾았다. 입을 꾹 다문 오이카와는 3초 후 마츠카와를 돌아보며 웃었다. 여전히 입술을 꾹 닫은 채 눈꼬리만 아래로 내렸다.
“맛층 배 안 고파?”
“별…. 그래도 밥 먹을 시간이잖아. 먹을 수 있어.”
마츠카와는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그다지 식욕이 없어 시큰둥하게 별생각 없다고 말하다 말고 답을 바꾸었다.
“넌? 배고프지 않아?”
“글쎄. 맛있는 거라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이 대화가 집 근처에서 이루어졌다면 마츠카와는 필시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여행을 왔고 오이카와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길 좋아했다. 마츠카와는 지금 오이카와에게 해야 할 대답이 “배가 고프지 않으면 적당히 걷자.” 보다 “그 식당 음식 맛있으면 좋겠네.”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이카와의 신경을 긁을 것도 아니고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여기에 온 것이니 마츠카와는 식당에 가자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의 계산을 눈치챈 듯했지만 그 역시 마츠카와의 대답을 비꼬아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은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얼른 가자.”
그렇게 말하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보폭을 넓혀 걷는 오이카와와 나란히 걸었다. 길은 그리 넓지 않은데 무척이나 한적했다. 두 사람의 고향 역시 대도시가 아니어서 한산한 거리가 익숙한데도 이곳은 유달리 더 사람이 적은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입간판을 내세운 낮은 건물 1층 점포들 모두 문이 열려 있는데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마츠카와는 분명 소란스러움과 고요함 중 선택하라면 고요를 택하겠지만 지금 이곳의 적막함은 그가 편안하게 느끼는 종류의 조용함이 아니었다. 마츠카와는 자신이 오이카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라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조용하기만 한데 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츠카와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오이카와는 평소에 느릿하게 걷는 탓에 자신보다 걸음이 약간 느린 마츠카와가 자신보다 앞서 걷자 의아한 얼굴을 하고 제 걸음도 조금 더 빨리했다.
“뭐야, 맛층 배고파졌어?”
“으음…. 그런가….”
그런 건 아니지만 괜히 기분이 껄끄럽다든가 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 마츠카와는 말끝을 흐렸다. 오이카와는 폰 화면과 길을 번갈아가며 보면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식당은 그리 멀지 않았다. 큰길에서 들어가 좁고 잘 정리된 골목길을 따라 모퉁이를 세 번 정도 꺾었을 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운이 나쁜지 가게 유리문엔 ‘close' 팻말이 걸려 있었다.
오이카와가 선택한 곳이나 마츠카와는 그 팻말을 보는 순간 낭패라고 생각했다. 곁눈으로 본 오이카와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츠카와는 다른 곳으로 가자는 의미로 “운이 나쁘네.” 라고 말을 할지 꼭 면 요리를 먹을 이유는 없다는 의미로 “시간 많잖아. 다른 데 가자.” 라고 말할지 고민했다. 고작 3초 정도의 시간인데 마츠카와보다 먼저 오이카와가 말했다.
“면 아니어도 상관없지?”
일부러 내는 가벼운 목소리에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면 종류가 먹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마츠카와는 묻지 않았다. 여행이니까, 두 사람 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분기점이니까 오이카와 역시 제 기분을 누르고 있음을 알기에 마츠카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 이쪽인가….”
“어, 잠깐만.”
마츠카와는 전화를 받았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가 그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전화를 받는 내내 열심히 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마츠카와는 통화 상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오이카와.”
“응?”
“여관에서 전화 왔는데 여관에 물건을 대는 사람이 터미널 지나갈 거래. 부탁했으니까 그 차 타고 오라고 하네.”
“그래도 돼?”
“버스가 너무 늦다고 이게 나을 거라는데.”
“그야 그렇지만. 폐 끼치는 거 아닌가.”
“괜찮으니까 전화했겠지.”
괜히 타인을 수고스럽게 하는 게 내키지 않는 듯 보였으나 예정에 없던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오이카와는 “그래, 그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언제 가는 거야?”
“이 삼십 분 안에 터미널 도착한대. 전화번호 알려줄 거라고 했으니 연락 오겠지.”
“가서 짐 찾아야겠네. 로커에 괜히 넣었네.”
말로는 투덜거렸으나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았다. 오이카와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내일까지 마을에는 마츠리가 열렸다. 오늘 시간이 맞으면 가자고 할 예정이었기에 마츠카와는 빨리 여관으로 갈 수 있게 된 사실에 안도했다. 오이카와의 가벼운 투덜거림에 마츠카와가 작게 어깨를 으쓱이자 오이카와는 한쪽 입술을 슬쩍 끌어올려 웃었다. 팽팽했던 분위기가 약간 느슨해져 마츠카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예정인지 마츠카와는 다행이라고 생각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갈 곳이 없으니 자연스레 터미널로 돌아온 두 사람은 코인 로커에서 짐을 찾았다. 전화가 오면 바로 움직일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대합실 의자에 앉아 마츠카와는 게임을 하고 오이와는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며 전화를 기다렸다. 30분 정도면 충분할 거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30분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길이 막혀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십여 분을 더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마츠카와는 게임 화면을 닫고 대합실에 걸린 시계를 흘끔거렸다. 오이카와는 뚫어져라 폰 화면은 보고 있었다. 누구와 대화하는지 연신 손가락을 움직이는 걸 보자니 너무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으나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게 될 것 같아 마츠카와도 제 폰 화면에 집중했다. 당연히 집중할 수 없었고 마츠카와는 화면 상단에 숫자가 느리게 바뀌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자리에 앉은 지 사십 분이 지났다. 마츠카와는 폰 화면을 켜놓은 채 폰을 잡지 않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엄지 끝으로 검지 끝을, 다시 검지 끝으로 엄지 끝을 꾹꾹 누르며 그만두어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그 행동을 반복했다. 마츠카와는 만약 오이카와가 전부 준비한 여행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지 떠올려 보았다. 조금 지루하고 짜증스럽기는 하겠지만 딱히 화가 날 것 같진 않았다. 계획이 틀어진 게 두 사람의 잘못도 아니고 화를 낸다고 해서 시간이 당겨지는 것도 아니고 여차하면 밤에 버스를 타면 되니 좀 오래 기다려도 상관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마츠카와는 자신이 준비하고 오이카와가 자신을 믿고 따라온 이 상황에서 계획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초조했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와 달리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일을 진행하는 걸 선호했다. 임기응변도 뛰어나니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빈틈없이 시뮬레이션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뭐 하나 허비하는 일 없이 행동하는 것에 익숙했다. 고등학교 때 배구를 할 때도 그는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동원해 분석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예측했다. 그래서 마츠카와는 지금 이 상황이 오이카와를 불편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두 사람을 데리러 온다는 차가 늦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겠지만 마츠카와가 버스 시간표가 바뀐 것을 몰랐던 건 책망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다 준비했다고 해도 버스 시간표 같은 건 출발하기 전에 확인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해 마츠카와는 저도 모르게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싶어 폰 화면을 보았지만 시간은 고작 2분이 지나있었다.
이쯤 되면 평소의 오이카와라면 본심과 상관없이 “뭘 그렇게 초조해해? 그냥 기다리면 되지.” “맛층 못생긴 얼굴 찌푸리지 마.” 같은 소릴 했을 텐데 오이카와는 그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끊임없이 화면을 두드렸다. 마츠카와 쪽으로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지 실수로라도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는 게 뻔히 보여 그는 한숨을 눌러 참으며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며 이마를 문질렀다.
초조한 걸 너무 티 내는 것 같아 손을 도로 내린 마츠카와는 이번엔 손톱 끝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꾸욱 눌렀다가 떼어내자 손톱 모양으로 살이 패였다. 다시 한 번 눌렀다가 떼어내자 또 자국이 생겼다. 마츠카와는 몇 번 그 행위를 반복한 후 손을 쭉 펼쳐 나란히 손톱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금방 사라지고 말 거라는 걸 아는데도 붉은 자국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드는 건 이 자국이 마음에 남은 상처 같아서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마츠카와는 더욱 뚫어지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맛층.”
생각지 못한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마츠카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를 돌아보지 않고 폰 화면을 보며 여전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전화해봐야 하는 거 아냐?”
오이카와의 의견은 타당했다. 하지만 마츠카와는 어쩐지 전화하기가 망설여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면이 꺼진 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오이카와는 흘끔 마츠카와를 보더니 더 말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차라리 “그냥 하면 되지 뭘 고민해? 내가 해?” 라고 평소처럼 말한다면 나을 텐데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에게 끝까지 맡겨 놓을 생각인지 입을 닫았다. 애꿎은 버튼만 눌러 화면을 켰다. 망설이는 사이 일 분이 지났다. 마츠카와는 바짝 입이 말라 혀로 입안을 훑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경직된 걸 보면서 마츠카와는 전화기 모양 아이콘을 눌렀다. 가장 위에 자리한 전화번호를 누를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또 일 분이 지났다. 정말 여기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간 오이카와의 화를 돋울 것 같아 마츠카와는 손가락을 전화번호 숫자 위로 가져갔다.
“어….”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마츠카와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전화를 받았다. 유쾌한 중년 남성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크게 들렸다. 일정이 조금 뒤엉켜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한 그는 10분 내로 터미널에 도착할 예정이니 앞에 나와 있으라고 했다. 마츠카와는 알겠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고 오이카와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폰에서 시선을 뗀 그가 마츠카와를 보고 있었다. 빤히 바라보는 모양새가 이제 목적지에 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썩 기분이 좋지 않음을 말해주었다. 그 얼굴을 보고 마츠카와는 어색하게나마 웃어야 하나 아니면 별일 아니라는 듯 무표정하게 있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오이카와를 대하는 건 이런 점이 불편했다. 보통 때라면 대충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오이카와가 마츠카와의 생각을 읽어내니까 자신의 의견을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되어 편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오이카와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역으로 계산해야 해서 피곤했다. 오이카와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그래서 피로가 쌓이면 쌓이든 만큼 예민해졌다.
이번엔 이전에 비슷한 상황일 때보다 긴 시간 이 상태를 지속 중이었고 그만큼 피로도도 전에 없이 높아졌다. 어느 기점에서 참지 못하고 상대를 몰아세우면 걷잡을 수 없으리란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기에 마츠카와는 진심을 툭 내뱉을 수 없었고 오이카와도 꼬투리를 잡아 빈정거리지 못했다.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판단을 마친 마츠카와는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웃는 낯을 만들기로 했다.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오이카와의 한쪽 입술 끝이 올라갔다. 웃어서 뭐 어쩌자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드러낼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대로 곧장 표정을 지웠지만 눈가에 남은 감정까지 거두진 못했다.
“십 분 정도면 온대.”
“…그래.”
한 시간 전에는 삼십 분이면 온다고 하지 않았냐고 말하고 싶어 하는 얼굴을 하고도 오이카와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화를 내지 않는 건 좋지만 대화가 이어지지도 않았다. 마츠카와는 폰에서 눈을 떼고 팔을 겹쳐 낀 채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정면을 보는 오이카와 옆에서 몸을 앞으로 숙여 팔을 허벅지에 얹었다. 오이카와가 보는 것보다 낮은 시선으로 정면을 보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마츠카와는 때때로 미동도 않고 자리에 그대로 앉은 오이카와를 곁눈으로 보았다.
대합실에 걸린 시곗바늘이 더디게 움직였다. 마츠카와가 네 번 시계를 볼 동안 초침은 겨우 한 바퀴를 돌았다. 손님이라곤 없는 대합실엔 마츠카와 스스로 내뱉는 숨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조금 껄끄러운 시선. 마츠카와는 처음에 그 시선이 오이카와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눈동자를 옮기자 그 시선 끝에는 매점 안에 자리한 노부인이 있었다. 마츠카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초침이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마츠카와는 조금 전 대합실을 나설 때 노부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호감만이 아닌 감정을 제삼자가 봐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인가 싶어 어쩐지 입이 썼다. 노부인은 규칙적이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뜨개바늘을 움직이면서 시선은 내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오이카와 역시 그 시선이 불편했는지 십 분에서 절반이 지나지 않았는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갈까?”
“응. 좀 갑갑하네.”
오이카와가 먼저 말하기 전 마츠카와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작게 미간을 찌푸리고 매점 쪽으로 곁눈질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츠카와는 자리에서 일어서 보스턴백을 어깨에 둘러멨다. 오이카와는 자리 앞에 놓아둔 작은 슈트케이스의 손잡이를 뽑았다. 바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이카와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마츠카와는 서둘러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노부인의 시선은 계속 두 사람을 따라왔지만 마츠카와는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밖은 조금 더웠다. 하늘은 맑았고 그만큼 오이카와와 잘 어울렸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제법 나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정은 소용없는 법이고 오이카와와 마츠카와는 현재 쉽게 말해 냉전 중이었다. 햇살이 눈부셔도, 그 햇살을 받은 오이카와가 아무리 빛나고 있어도 그 광경은 어딘가 회색 입자가 가득 찬 공간을 통해 보듯 동떨어진 것만 같았다.
대로변에 선 오이카와는 차가 지나가는지 주변을 살폈다. 작은 승용차가 한 대 무심하게 지나갔다. 모터바이크도 한 대 지나갔다. 그리고 거리는 정적에 잠겼다. 오이카와가 마츠카와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마츠카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마츠카와는 자신이 정말로 오이카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이 여행을 계획했는지,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관계를 지속하는 건 그저 오이카와와 헤어진 상태에 대한 정보가 없어 고려하지 않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계속 이대로 연인이라고 특정 짓는 것이 과연 유용한지도 궁금했다. 그러다 문득 마츠카와는 자신이 유용성을 따지는 타입은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오이카와와 왜 사귀냐고 누군가 물으면 언제나 “그냥.” 이러거나 “어쩌다 보니.” 라고 답해왔다. 그런 주제에 오이카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유용하냐 아니냐 따지는 건 그저 헤어지기 위한 핑계를 만들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고 싶은 건가. 오이카와는 어떻지? 마츠카와는 곧게 서 주변을 둘러보는 오이카와의 옆모습을 보며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오이카와도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인내한다는 제 생각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차 아니야?”
“응?”
오이카와가 멈춰선 트럭을 가리키는데 전화가 왔다. 마츠카와가 전화를 받자 오이카와가 가리킨 트럭 운전석 창문에서 팔이 나와 손을 흔들었다. 마츠카와는 가방을 고쳐 매고 오이카와와 함께 트럭으로 다가갔다.
“많이 기다렸죠?”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와주셨잖아요. 번거로우실 텐데. 감사합니다.”
“트럭이라서 좀 불편하겠지만 버스를 늦게까지 기다리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여기 터미널 주변엔 볼 것도 없어요.”
“트럭은 시야가 높아서 좋아요! 오래간만에 타는 거라 신나는데요?”
“그러면 다행이에요. 짐은 뒤에 실어요.”
오이카와는 언제 그런 무표정한 얼굴을 했었냐는 듯 밝은 얼굴로 남자를 상대했다. 마츠카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에게 인사하고 먼저 트럭에 탔다. 중간 자리가 불편하니 괜히 오이카와에게 불만을 더해주고 싶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마츠카와는 오이카와가 처음 보는 남자와 가까이 앉는 게 싫었다. 질투라기보다는 가는 내내 마츠카와를 싹 무시하고 그와 표면적으로나마 즐겁게 대화를 나눌 게 눈에 선해서였다. 마츠카와는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가방을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 옆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메더니 습관처럼 차내를 둘러보았다.
“두 시간 정도 걸려요. 점심 먹었어요?”
“아니요.”
오이카와의 대답에 마츠카와는 그들이 먹은 것이라곤 아침 일찍 기차에서 먹은 빵 두어 개가 다임을 떠올렸다. 시간이 비어서 가려 했던 식당은 문을 닫아 두 사람은 식사를 하지 못했다. 당장 배가 고픈 건 아니지만 두 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간다면 출출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츠카와는 오늘 점심부터 식사를 여관에 부탁해놓은 상태지만 일정이 틀어져 늦게 도착한다면 거기서 식사를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시 전화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남자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는 도중에 배고플지도 모르겠는데요? 여관에 도착하면 밥해달라고 해요. 거기 밥 맛있어요.”
“일단 부탁드리긴 했습니다.”
마츠카와가 대답하자 남자는 잘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잘했어요. 말해놨으면 가서 식사하면 되겠네요. 거긴 들어가면 나오기도 힘드니까 식사는 다 부탁하는 게 낫죠.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거긴 어쩐 일로 가요? 폰도 안 되고 갑갑해서 별로 안 좋아하던데.”
“전화가 안 되나요?”
“몰랐어요? 거기 무선 전화 안 돼요. 산골짜기라서 그런지…. 그래서 젊은 친구들은 안 좋아하는데 괜찮겠어요?”
오이카와는 애매하게 웃으며 “그러게요….” 라고 대답하며 마츠카와를 곁눈으로 훑었다. 마츠카와는 여관에 가는 버스 안에서 말할 생각이었기에 조금 낭패스러웠다. 마츠카와도 그렇지만 오이카와도 손에서 폰을 거의 놓지 않았다. 두 사람 다 타인과의 교류는 상당 부분 메신저에 의지했고 정보도 대부분 인터넷 검색으로 얻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선통신망을 전혀 쓸 수 없는 환경에 가자고 하면 반대할 게 뻔해서 마츠카와는 그 부분을 설명하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찾아본다면 알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한몫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정말 마츠카와에게 전부 맡길 심상이었는지 알아보지 않은 듯했고 마츠카와는 내심 오이카와가 알고 오길 바랐던 마음과 달리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조금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쉬러 가는 거라서요.”
“그래요? 그럼 더할 나위 없죠. 조용하고 밥도 맛있고 방도 널찍해요. 이번 주는 마을 마츠리도 있으니 구경도 하고요.”
“네에….”
마츠카와는 특별히 할 말이 없어 어미를 끌었다. 쉬러 왔다는 말에 오이카와의 시선이 느껴졌다. 결국 여행 와서도 방에서 늘어져 있을 거냐고 묻는 느낌이 들어 얼굴이 따끔거리는 기분이었지만 마츠카와의 계획은 이번엔 오이카와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기에 억울했다. 정말로 방해받지 않고 두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 이곳을 골랐다. 여기서 변명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입을 다문 그는 딱히 할 일도 없어 룸미러에 매달린 작은 여우 가면에 시선을 주었다.
마츠카와는 그것이 일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우 가면이라고 생각했다. 하얀색의 뾰족한 귀, 붉은색으로 그려진 무늬.
“얘는 좀 독특하네요.”
그런데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했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가 말하는 이유를 곧장 눈치채지 못해 눈을 가늘게 뜨고 거울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것에 집중했다.
“눈 안이 검은 건 처음 봐요. 이마 무늬도 검정이고.”
오이카와는 마츠카와가 들으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마츠카와는 주먹만 한 그 작은 여우 가면 장식이 일반적인 것과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그렇죠? 신기하게 우리 마을 것만 그렇더라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글쎄요. 그냥 쭉 이걸 써왔으니까 그냥 이건가보다 하는 거지.”
“그렇군요….”
“여관 근처에 산책하다 보면 작은 신당 같은 게 많을 거예요. 가끔 거기 보면 이거랑 똑같이 생긴 가면인데 노란색이 발린 게 있을지도 몰라요. 그 가면이 있는 신당에 있는 건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세요.”
“왜요?”
“여기서 노란색은 질병을 말하거든요. 아직 미신 믿는 사람들이 가면에 노란 칠을 해서 신당에 공물이랑 같이 바치면 애들 감기 같은 거 낫는다고 생각해서 가져다 놓거든요.”
오이카와의 물음에 대답하는 남자는 미신을 믿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서 주의 주는 것도 좀 이상했다.
“음식이나 돈 같은 걸 같이 가져다 놓는데 그거 가져가다 걸리면 좋은 꼴 못 봐요.”
마츠카와는 그런 의미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말을 이었다.
“아프면 병원에나 데려갈 것이지 신에게 빌어봐야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니까요.”
마츠카와는 별달리 대답할 말이 없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기에 여기 온 거면 마츠리 구경하러 온 건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온 김에 구경할까 하고 있습니다.”
“마을이 작아서 그렇게 큰 행사는 아닌데 신사에서 무녀들이 나눠주는 술이 맛있어요. 술 마실 수 있죠?”
“예….”
“다행이네요. 그거 말곤 우리 동네긴 하지만 크게 볼 건 없어요.”
우연히 마츠리 기간이 겹친 것이지 딱히 꼭 이 마을 마츠리를 보러 온 건 아니기에 마츠카와는 대답이 궁했다. 곧장 답을 하지 못한 탓에 어색한 침묵이 찾아오나 싶었는데 그사이를 오이카와의 활달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신사에서 나눠주는 술 말고 이곳 마츠리는 뭐가 유명한가요?”
“글쎄요…. 우리야 그냥 옛날부터 하던 거니 뭐가 유명한지 알 수가 있나. 전에 기자 양반이 우리 동네 마츠리에 쓰는 수레랑 음악이 독특하다고 한 적은 있어요. 그런 거 잘 알아요?”
“아니요.”
“그렇죠? 우리도 젊은 애들은 관심도 없고, 마츠리도 돈 받고 아르바이트하러나 나오지 옛날처럼 신성시하는 분위기도 아니에요. 나 어릴 때만 해도 마츠리 전에 신사에서 재계한다고 할머니와 어머니도 며칠씩 금식하고 그랬거든.”
“마츠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인가 보네요.”
“외진 곳이니까 옛날 풍습이 많이 남아 있는 거죠. 뭘.”
“그러면 이 가면은 행운을 가져다주거나 그런 거예요?”
오이카와가 끊임없이 흔들거리는 여우 가면 모양 장식품을 보며 묻자 남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액운을 막아준다고 우리 딸이 달아놨어요.”
“행운을 가져다주는 게 더 좋지 않아요?”
“액운을 막아주는 게 더 중요…. 어이쿠!”
남자는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운전대를 돌렸다. 시커멓고 커다란 물체가 앞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한순간의 일이라 오이카와와 마츠카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차는 갓길에 멈춰 섰고 마츠카와는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수 없는 까마귀 새끼 같으니라고. 미안합니다. 종종 차 유리에 빛이 반사된 걸 보고 까마귀가 날아오는 일이 있어요.”
“…괜찮습니다.”
운전 부주의도 아니고 까마귀가 달려든 것이니 마츠카와는 괜찮다고 말하며 오이카와를 돌아보았다. 놀라서 숨을 멈췄다가 도로 내쉰 오이카와 역시 돌발상황에 호들갑을 떨 생각은 없는지 도리어 남자를 향해 괜찮냐고 물었다.
“이래서 행운이 오는 것보다 액운을 막는 게 중요해요. 액운 때문에 죽을 수도 있거든.”
“그러게요. 따님이 좋은 걸 선물해주셨네요.”
오이카와는 남자의 말에 곧장 웃으며 답했다. 미신을 믿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결국 그도 미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나 보다 생각하며 마츠카와는 가방을 고쳐 안았다.
“윽….”
마츠카와는 얼굴을 찌푸리며 어깨를 움츠리는 오이카와에게 “왜?” 라고 묻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사이드미러에 바닥에 떨어진 까마귀시체가 비쳤다.
“쯧. 재수 없게.”
“안 치워도 됩니까?”
“여기 사람 잘 안 다녀서 차들이 부주의해요. 내렸다가 잘못하면 괜히 사고 나요.”
“아….”
“얼른 갑시다.”
남자는 그렇게 말한 후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꿨다. 마츠카와는 다시 오이카와를 돌아보았다. 낯빛이 썩 좋지 않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오이카와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오이카와의 손은 자연스럽게 마츠카와의 손을 피해 달아났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마츠카와는 갈 곳이 없어져 머쓱한 손을 거둬 다시 가방을 붙잡았다. 자세가 은근히 불편하고 옆에 운전하는 사람이 있으니 폰을 켜보기도 곤란했다.
차는 구불구불한 길을 끝없이 갔다. 남자는 이미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인 까마귀 사체에서 도망치듯 규정보다 속력을 더 올렸다. 단지 시간이 늦어서일 수도 있는데 마츠카와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과 달리 남자가 입을 굳게 다물어서일지도 몰랐다.
남자가 입을 다물고 오이카와도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의지를 보이지 않자 마츠카와는 그들 사이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헸다. 금세 좁은 길로 들어섰고 산을 돌고 돌아 논밭 사이를 한참 동안 가야 했다. 멀찍이 마을이 보였다. 마츠카와는 저기인가 싶어 고개를 앞으로 숙여 자세히 보려고 애썼다.
“여기서 또 좀 들어가야 돼요.”
“아, 네.”
그제야 남자는 입을 열었고 여관이 산 중턱인 건 알고 있으니 마츠카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흘끔 옆을 보자 오이카와도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사실에 안도했는지 내내 옆으로 돌리고 있던 고개를 바로 해 정면에 보이는 마을을 살폈다.
점점 가까워지자 생각보다 큰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여관이 무선통신이 안 된다는 말에 그 지역 전체가 아주 작은 촌락인 터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마츠카와는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알고 안도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오이카와와 함께 마츠리 구경을 하러 내려왔을 때 그래도 볼만한 것이 있을 듯해서였다.
마츠리 기간답게 마을엔 여러 현수막과 장식들이 내걸려 있었다. 사람들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다른 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유카타 차림이라는 점이었다.
“여긴 축제 때 대부분 유카타를 입어요. 옛날에 이곳에 길쌈 솜씨가 좋은 여자들이 많아서 축제 때 솜씨를 뽐내던 전통이 굳어졌거든.”
큰 도시에서는 마츠리가 있어도 유카타 차림을 잘 볼 수 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남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해주었다.
“가져오지 않았으면 마츠리 기간에는 여관에서 대여도 해줘요. 여긴 다들 유카타 차림인 게 나름 볼거리라.”
“아, 가져왔어요.”
“그래요? 준비성 좋네.”
의외라는 오이카와의 시선이 느껴져 마츠카와는 모른 척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오늘 푹 쉬고 내일 마을로 내려와요.”
“그러려고요.”
세 사람을 태운 차는 마을을 가로질렀다. 길은 한층 더 좁아졌고 차는 속력을 낮췄다. 고르지 않은 길 탓에 차가 덜컹거렸다. 산과 산 사이에 가려진 길에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한 꺼풀 어둑이 꺾여 든 빛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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