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오이] It's a PLEASURE.
It's a PLEASURE.
발간일 : 2015년 11월 15일 하이큐 주장즈 배포전 '너의 의미'
커플링 : 마츠카와X오이카와 (R-19)
표지 일러스트는 섶님(@seoooop)께서 그려주셨습니다.
※ 책 사양
신국판 인쇄 86 페이지
※ 가격
8,000원
※ 주의사항
● 성인이신 분들에게만 판매합니다.
● 두 사람 다 성인인 설정입니다.
● 분위기는 가볍습니다만 살인에 대한 설명, 묘사가 들어가니 민감하신 분들께서는 주의 부탁드립니다.
※ 샘플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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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이냐고? 글쎄….”
그 질문에 마츠카와는 정말 대답할 말이 궁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쩌다보니. 라고밖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는 처음 죽인 사람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 첫 살인이란 첫사랑, 아니 첫 섹스의 기억과 같았다. 무척 서툴렀지만 아주 특별한, 그 후로 그보다 좋았던 적이 몇 번이나 있어도 처음이라는 건 두 번 오지 않으므로 미화되고 또 미화되어 가장 특별한 기억으로 마츠카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즐거워서?”
“즐거워?”
마츠카와의 눈앞에 기둥에 묶인 채 앉은 남자는 사내치곤 곱상하게 생겼다고 말해도 좋을만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 얼굴을 보며 마츠카와는 그가 “살인은 죄야!” 라고 말할지, 아니면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라고 할지를 기다렸다.
“섹스 같은 거야?”
“음?”
의외의 질문에 마츠카와는 짙은 눈썹의 높이를 달리했다. 이 시간을 위해 준비한 예리한 칼에 손끝을 베일 뻔했다.
“사람 죽이는 게 즐겁다며? 섹스 같은 거냐구.”
“음…. 그런가?”
겁에 질린 게 아니라 살인을 즐겁다고 말하는 네놈에게 질렸다. 라는 얼굴로 마츠카와를 보는 눈에는 혐오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츠카와는 그가 배짱도 있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귀엽다는 건 철저하게 상대가 자신에게 무해하다고 생각할 때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마츠카와에겐 눈앞의, 제법 건장한 남자가 그랬다. 잠시 후면 지금처럼 노려보기는커녕 숨도 쉬지 못하게 될 대상이다. 그러니 일반적인 것과 조금 다르게 반응하는 그가 귀여웠다.
“섹스 해봤어?”
그 말에 마츠카와의 눈썹 높이가 다시 달라졌다. 눈앞의 상대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는지 재차 물었다.
“해본 적 없지?”
손발이 묶이고 앞에 칼을 든 남자가 “이제 이걸 네 배에 쑤시려고.”라고 말했는데도 명백하게 도발하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역시 귀엽네. 라고 생각하며 마츠카와는 칼날을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기분 나쁜 면상을 하곤 생각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눈앞에서 날 길이가 족히 20센티는 넘어 보이는 컴뱃나이프를 이리저리 돌려대는 꼴을 보자니 아무리 미친놈에게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하는 오이카와라고 해도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났다. 눈앞의 남자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미친 게 틀림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 배에 칼을 꽂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웃는 얼굴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해야 할 것들이 잔뜩 남아있는데 미친놈의 손에 인생이 ‘THE END’ 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럭저럭 평탄한 인생을 살면서 직접 체험해 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살해당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로 인해 손끝이 벌벌 떨렸지만 오이카와는 애써 그것을 감추고 눈앞의 남자를 도발하듯 바라보았다.
남자가 오이카와가 뭐라 하든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미 저 칼은 몸 안에 깊이 들어와 박혔을 것이다. 다행히 남자는 오이카와의 태도에 흥미를 보였다. 오이카와는 그것이 남자의 과거 피해자들과 달리 자신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기회가 생겼다면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살인보단 섹스가 즐거울 걸?”
남자의 눈꼬리가 휘었다. ‘니가 뭘 알아서?’ 라는 눈이었다. ‘중범죄보다 섹스가 즐겁고 안전한 게 당연하잖아!’ 라고 외칠 뻔한 오이카와는 숨을 고르고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입술 끝이 절로 경련을 일으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어차피 죽일 거면 솔직하게 말해봐. 해본 적 없지?”
“흐음….”
침묵은 긍정. 나이도 많아 보이는데 여직 동정이라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진짜 불쌍한 건 자신이었으므로 오이카와는 어떻게 남자를 설득할지 머리를 굴렸다.
마츠카와는 입술이 파리하게 질려있는 데도 조잘대며 말하는 이번 희생자의 태도가 약간 의문스러워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살인보다 섹스가 즐겁다. 라….
마츠카와에게 살인은 단순한 즐거움과는 달랐다. 그는 그 행위로 얻은 것을 다른 것에서 대신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할 생각도 없었고 대신할만한 걸 겪어보지도 못했다. 인간의 복부에 깊숙이 칼을 찔러 넣는 건 생각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역시 눈앞의 남자가 조금 색다르긴 하지만 얼른 그 흥분을 손에 넣고 싶었다.
“자, 잠깐!”
오이카와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도 마츠카와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전부 울고 소리치고 애원하고 저주를 퍼부었다. 너무 시끄러우면 입을 틀어막기도 했지만 마츠카와는 보통 마지막 단발마를 지르도록 내버려두었다. 이곳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곳이고 설사 지나가더라도 건물의 방음은 완벽했다. 컴뱃 나이프 손잡이를 다시 고쳐 쥔 마츠카와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애써 강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It’s a PLEASURE.
오이카와 토오루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일치감치 깨달았다. 호기심도 왕성했고 동성애에 대한 편견도 없었다. 서슴없이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가입한 후 활동도 하고 병신 같은 남자들도 여럿 만났다. 지금이야 거기 휘말린 자신도 치기어리고 병신 같았다고 술안주거리 삼아 웃으며 말하지만 그땐 이별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삼일 밤낮을 눈물로 지새운 적도 많았다. 다시는 이런 사랑을 하지 않을 거라고 매번 다짐해놓고도 오이카와는 또 금세 사랑에 빠졌다.
그러니 지금 이 사태도 자신의 책임인가. 오이카와는 간밤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번에 만난 남자는 꽤 괜찮은 줄 알았다. 키가 좀 작고 배도 좀 나왔지만 마스크는 괜찮은 편이고 매너도 나쁘지 않았다. 말하는 게 좀 허세에 차있긴 해도 이정도만인 게 어디냐 싶었다. 클럽에서 눈이 맞자마자 모텔에 가고 싶어 하는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술을 마시고 자연스레 장소를 옮겼다. 섹스도 나쁘지 않았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몇 번 더 만난 후 사귀기로 했다. 그렇게 안정적으로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남자는 바닥을 드러냈다. 알고 보니 낭비벽이 대단했는데 그 남자가 오이카와의 통장에 손을 댔다. 재정에 큰 타격을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오이카와는 남자의 머리에 드라마처럼 물을 쏟아 붓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왔다. 그런 남자만 만나는 운명을 원망하고 그 병신 같은 남자를 향해 분노를 드러내다 남자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는 스스로를 타박하며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갔다.
싸구려 사케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하고 빈속에 술부터 들이부었다. 술이 넘어가며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또 한 잔을 부었다. 애초에 주량이 많지 않은 오이카와는 금방 취했다. 그래도 마셨다. 도대체 내 인생은 이게 뭐냐고,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래도 잘나가는 남자이건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남자가 궁했던 적은 없었다. 차라리 많아서 문제였으면 문제였을까. 하지만 다 부질 없단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병신이란 병신은 다 자신에게 달라붙는데 남자가 많은 게 무슨 소용이랴. 어릴 때 친해진 자신과 동갑인 게이 총각이 10년 째 한 남자랑 연애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술잔에 넘치도록 술을 부었다. “내 팔자야.” 오이카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술을 마셨다.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혼자 들어와 안주는 식어가도록 내버려둔 채 술을 마시며 훌쩍훌쩍 우는 모습이 술집의 뭇 여성들의 동정을 샀는지 2시간 동안 세 명의 여자가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때마다 오이카와는 그냥 그 자리에 엎드려버렸다. 게이인 걸 숨기기 위해 여자와 가깝게 지내는 편이긴 하지만 이런 날엔 제발 내버려뒀으면 싶었다. 여자들은 그런 오이카와를 아쉬운 눈으로 보며 “힘내세요.” 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차라리 이성애자였으면, 저렇게 예쁘고 귀여운 여자를 만나서, 결혼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자 더 서러웠다. ‘남자 따위 더러워!’ 라는 여중생 같은 소릴 하며 오이카와는 잔을 비웠다. 주량을 넘기고도 한참을 더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선 오이카와는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걸음이 갈지자를 그리는 와중에도 제대로 계산서를 확인한 후 금액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왔다.
초저녁에 들어갔는데 밖으로 나오니 컴컴한 밤하늘엔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깜박이며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에 대로를 향해 걸었다. 택시라도 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가져간 돈이 떠올랐다. 그 돈이면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해도 한 달은 했겠단 생각이 들어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개새끼야!!!!!”
오이카와는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끗거리며 쳐다봤지만 한계 이상으로 술이 들어간 오이카와에게 제대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개새끼….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나쁜 새끼….”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오이카와는 손등으로 그것을 문지르고 비틀비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서 죽은 듯 자고 일어나 깨끗이 잊을 거라고 다짐했다. 오후에 내일 휴가신청을 해뒀다. 오늘이 목요일이니 일요일까지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개새끼 욕을 하고 나면 다음 주엔 멀끔한, 모두의 상큼한 오이카와씨로 돌아가 출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놈 때문에 울화통 터져 화를 내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택시 정류소로 향했다.
“어.”
“죄송합니다.”
“아녀여. 제가 죄송함미다….”
부딪친 사람에게 똑바로 사과하려 했지만 혀가 꼬여 발음이 뭉그러진 게 자신의 귀에도 들렸다. 그래도 휘청 거리는 몸으로 제대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네. 갠차나여? 집에 감미다.”
술을 마실 거면 곱게 처마실 것이지. 오이카와는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제대로 된 언어도 구사하지 못하는 자신이 병신 같아서 웃었다. “시발, 그 새끼가 뭐라고. 천하의 오이카와씨가. 씨발….” 하고 중얼거렸던 것도 같았다. 확신할 순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자신의 드러난 팔을 붙잡는 남자의 손이 꽤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단 생각도 그 와중에 했다. 손이 굉장히 딱딱했던 것 같았다.
“도와줄까요?”
“아님다. 혼자 가 수 이써여.”
“지하철?”
“택시 탈 거여여.”
“거기까지 데려다 줄게.”
“갠찬슴미다.”
“금방 넘어질 것 같은데?”
“갠차는데….”
오이카와는 웅얼웅얼 말하며 그 와중에 언제 봤다고 반말이지? 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취해서 정신이 없었고 일단 집에 가서 신발 벗고 눕고 싶단 생각이 먼저라 사소한 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이 남자는 그 개새끼보다 키도 크고 가슴도 넓었다. 잠깐 기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죄소옹해여….”
“집 주소 말 할 수 있겠어?”
오이카와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오이카와가 넘어지지 않도록 꽉 붙잡아주었다. 이렇게 안정적인 품에 기대보는 건 굉장히 오래간만이어서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오이카와가 걷기 힘들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지 좀 더 자신에게 기댈 수 있도록 끌어안듯이 잡아당겼다. 오이카와는 모르는 척 슬쩍 남자에게 몸을 기댔다.
‘역시 단단한 가슴팍이 최고야. 그 새끼는 내가 운동하라고 해도 말도 안 듣고.’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에게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자동차 헤드라이트에서 내뿜는 빛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기억이 희미했다. 어떻게든 제대로 집에 찾아가려고 챙겨두었던 정신줄이 남자의 넓은 품에 기대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택시였는지 차량 뒷좌석에 태워지고 웅얼웅얼 집주소를 이야기 한 것도 같았다. 도착하면 깨워주겠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갑갑한 옷을 다 벗어던지고 얼른 편안한 침대에서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옷을 벗어던지고 싶다고 한 건 옷을 벗고 침대에서 쉬고 싶다는 거지 이렇게 알몸으로 팔다리가 기둥에 묶이고 싶다는 말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저리고 으스스 몸이 떨려 이불을 찾으려 했던 것뿐인데 오이카와는 눈을 뜨자마자 사지가 속박된, 말도 안 되는 자신의 모습에 직면해야 했다.
“어….”
어이없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오이카와는 제대로 된 단어를 내뱉지 못했다. 지나치게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어서 이런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뺨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지만 팔다리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갈증이 나는 목을 축이기 위해 침을 삼키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환풍기도 없이 하얀색과 하늘색의 욕실용 타일로 둘러싸인 세 평 남짓한 공간은 흡사 오래된 공중목욕탕을 연상시켰다. 익숙한 염소 냄새 때문에 옛날 수영장 같단 생각도 들었다. 천장은 높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팔을 뻗으면 어렵지 않게 천장에 손이 닿을 듯한 높이였다. 한쪽 벽에 샤워헤드가 달린 긴 호수가 연결된 수도꼭지가 보였다. 바닥엔 개수구도 있었다. 하지만 욕실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았다. 사지가 묶인 기둥은 벽에 가까운 천장에서 바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가 어디인지, 왜 이런 모습으로 묶여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꿈인가? 꿈이겠지?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
그때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정면에 난 문이 열렸다.
“헉?!”
“깼어?”
오이카와는 문을 닫고 문에 걸린 고리에 수건을 건 후 그 앞에 샤워커튼을 치고 자신을 돌아보는 남자가 손에 든 흉측한 컴뱃 나이프보다 그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라는 것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키가 크고 기본 체격이 좋아 보이는 몸은 그저 근육의 크기를 키운 게 아니라 실질적인 쓰임으로 다져져 구석구석 촘촘하게 달라붙어 제법 근사했다. 거기다 짙은 음모 사이에 자리한 것도 꽤….
이런 상황에서도 남자의 몸이 먼저 눈에 들어오다니 수컷의 습성이란. 이란 생각에 한숨을 내쉰 오이카와는 다시 찬찬히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 아직까진 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탓도 컸다. 남자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만큼 검고 짙은 눈썹 아래 어딘가 조금 졸린 듯, 나른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콧대는 높고, 매부리라고 하긴 미안하지만 살짝 아래로 휘어 그 나름의 매력을 가진 코와 비죽이 내민듯한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빈말로도 아주 잘생겼다고 말해주긴 힘들어도 꽤 특징적이고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남자는 오이카와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신기한지 푸르스름해 보이는 흰자위에 자리한 작고 검은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여 오이카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는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왼손 엄지와 검지로 서슬 퍼렇게 빛나는 칼날을 슬슬 문질렀다.
“사원증 사진이 너무 어린 거 아니야? 언제 사진이야?”
“입사 때 사진인데?”
“장례식에도 이 사진 쓰려나?”
“뭐?”
남자는 대답대신 칼을 들어올렸다. 이리저리 손목을 돌리자 그 움직임에 따라 칼날에 반사된 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
알몸의 남자가 칼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비현실적인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꾸, 꿈일 거야. 이와쨩 살려줘!!!’ 오이카와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잠깐!!”
남자는 짙은 눈썹 한쪽을 끌어올리며 의문을 표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저런 다듬지 않은 송충이 눈썹이라니, 같은 남자로서 정말 혐오스럽다고, 남자라도 자신을 꾸미고 가꿔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 잠깐만. 지금 오이카와씨를 강간하고 죽이겠다는 거야?”
“강간?”
남자는 정말 강간 같은 건 개미 발톱에 낀 떼만큼도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얼굴을 했다.
“응.”
“그걸 내가 왜 해?”
“하지만 이렇게 홀딱 벗겨놓으면 그런 생각하잖아.”
“보통은 남자에게 강간당한다는 생각을 안 하지 않나?”
“그….”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반평생을 남자와 침대를 공유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말대로 보통이라면 남자가 남자에게 강간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했을 것이다.
“그럼 왜 다 벗고 있는 건데!”
“이거? 편해서.”
“변태야?”
“아니. 피 튀니까 옷 빠는 것도 일이라서.”
“뭐?”
“이러면 그냥 씻으면 되잖아.”
‘설거지 할 때 물이 튀니까 앞치마를 하는 거잖아?’ 라고 말하는 듯한 평온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피가 튀니까 옷을 벗고 있다니 어느 나라 방식이냐 그건!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그럼 죽일 거야?”
“어.”
“왜?”
“바로 죽을 건데 알아서 뭐 하게?”
“왜냐니.”
확실히 그의 말대로 정말 바로 죽일 생각이라면 굳이 이유를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는 건 억울했다. 딱히 살해당해 마땅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나쁜 짓을 한 기억은 없었다. 비록 술 취하기 전 전남친의 머리에 물을 쏟아 부었다든가 몇 달 전 헤어진 남자 따귀를 때렸다든가 작년에 사귀었던 남자의 차 뒷문을 발로 찼다든가 하는 일을 하긴 했지만 그건 다 그 새끼들이 개새끼들이기 때문이지 무고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해나 손괴 죄를 저지른 적은 없었다.
“억울하잖아. 오이카와씨는 죽어도 쌀 만한 짓을 한 적은 없단 말야.”
“그렇게 말하는 게 죽어도 싸단 소리 안 들어봤어?”
“응.”
“그럼 그게 이유라고 쳐.”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죽어!”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을 순 없었다. 오이카와는 시간을 끌기 위해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범인을 너무 자극하지 말고 대화를 통해 동정심을 이끌어내면 충동적인 마음이 사그라져 본인의 행동을 후회하고 살려줄 확률이 높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나 오이카와는 필사적이 되었다. 아무리 매번 개떡 같은 남자들을 만났다지만 마지막이 알몸의 살인마라니, 이런 건 오이카와의 인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라….”
남자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이고 싶으니까.”
“뭐?”
“못 들었어? 죽이고 싶어서.”
“말도 안 돼.”
“안 믿어도 그거 맞아.”
“왜? 사람을 왜 죽여?”
“왜 죽이냐고?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