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시지마는 여자와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등장은 하지 않지만 언급은 계속 되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해피엔딩 아닙니다.
●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와 이와이즈미를 부르는 호칭은 우시와카쨩, 이와쨩으로 사용합니다.
※ 샘플 페이지
아래는 샘플입니다. 도입부분이고 수정 전이라 실제로는 변경, 추가된 부분이 있습니다.
웹 가독성을 위해 문단 사이는 띄워두었습니다.
RELATIVE HUMIDITY [상대습도]
장마가 끝나자마자 온 몸에 들러붙는 습한 공기는 피부의 숨구멍을 모조리 막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한여름 40도가 넘어가는 기온이라면 수분마저 기화하겠지만 온 세상이 점액질에 둘러싸인 미끈거리는 개구리 알 속에 갇힌 듯한 장마 직후의 날이라면 이 습도를 온전히 견디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공기 중의 수증기는 포화상태를 넘어 안경에 김이 서릴 지경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공기에 수분이 더해져 그것은 기분 나쁜 끈적임을 가지고 피부에 들러붙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색색 내쉬었다. 하얗던 양쪽 뺨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 핏기가 가셨던 입술도 어느새 덥고 습한 날씨로 달아올라 붉게 변해있었다.
“빌어먹을….”
오이카와는 악문 잇새로 욕지기를 내뱉고 숨을 깊이 내쉰 후 귀에 걸고 있던 블루투스 헤드셋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감사합니다. 오이카와입니다.”
― 약속시간이 지났다. 오이카와.
“… 아직 30초밖에 안 지났거든? 다 왔으니까 문이나 열지 그래?”
― 알았다.
손목시계를 보며 부드득 이를 간 오이카와는 약속시간이 지났다고 1분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하는 상대에게 퍼붓고 싶은 욕설을 속에 눌러 담으며 낮은 나무 울타리에 달린 문을 열고 수국이 가득 핀 작은 앞마당을 지나 하얗게 칠한 현관문 앞에 섰다.
부자들이 생각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40만평 가량의 부지에 세워진 공동체 입구의 공용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온 오이카와는 다시 튀어나오는 불만을 주워 삼켰다. 조용한 주거지역을 위해 경비가 삼엄한 공동체 입구 안에는 전기차 외엔 다닐 수 없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부자들이야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전기차로 갈아타는 모양이지만 오이카와는 외부에서 온 일개 인테리어 사무소 직원일 뿐이니 주차장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날은 덥고 습하고. 차 밖으로 나와 한 발자국도 걷고 싶지 않았다. 일이 아니었으면 이런 곳에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불평하던 그는 문을 열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차갑고 건조한 공기에 치밀어 올랐던 화가 한 풀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런 온도 변화에 안경이 희뿌옇게 변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감사했다. 오이카와는 서류가방을 옆구리에 끼우고 안경을 벗으며 현관에서 신발을 벗었다.
“늦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죄송하게 됐습니다. 우시지마 사장님.”
오이카와는 빈정거리며 익숙한 거실로 걸어 들어가 붉은 대리석 판을 올린 티테이블 위에 가방과 선그라스 대용으로 쓰는 연하게 색이 들어간 안경을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선 던져버리고 싶지만 이 대리석 판을 하나 컨펌 받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지를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새삼 다시 봐도 멋진 테이블이었다. 거기다 이 테이블에 맞는 가죽소파를 공수하는 것도 꽤 힘들었다. 가죽 염색이 마음에 들면 디자인이 싫다고 퇴짜 놓고, 디자인이 괜찮으면 색이 별로라고 까다롭게 굴던, 젊은 나이에 꽤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던 여성, 우시지마 부인을 떠올리며 오이카와는 눈썹을 찡그렸다.
대학교 2학년 때 우시지마는 가업을 이어야 한다며 배구를 그만뒀다. 오이카와는 계속 배구를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인연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 리그로 나갈 수 없었던 오이카와가 전공과 조금 상관없는 인테리어 사무실에 영업직으로 취직해 힘겨운 사회생활을 하던 와중에 우시지마와 재회하게 되었다. 소개를 받았기 때문도 있지만 견적이 워낙 크게 나온 일이라 오이카와는 이 일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안하겠다고 한다면 사장이 무덤까지 쫓아올 게 뻔했다. 게다가 우시지마는 반드시 오이카와가 책임자여야만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 자신은 영업사원일 뿐 담당자가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속으로 개새끼 소새끼라고 욕하면서도 오이카와는 장작 반년여에 걸쳐 이 집의 인테리어를 완성시켰다.
오이카와의 빈정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우시지마의 따가운 시선이 오이카와의 땀으로 끈적하게 젖은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우성알파인 그가 오메가인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만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 오이카와는 애써 모른 척 하며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용건이 뭐야? 우시와카쨩?”
계약은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 우시지마 부인은 몹시 흡족해 했고 그 증거로 공사대금에서 돈을 더 얹어주었다. 거기다 오이카와에겐 “남편이 많이 까다로워서 힘드셨죠?” 라고 웃으며 따로 봉투를 건넸다. 오이카와의 월 기본급 정도 되는 돈이 거기 들어있었다. 봉투를 내미는 손마저 우아한 여성 오메가인 그녀는 새 집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무척 행복해보였다.
그녀는 오이카와와 마주할 때면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어떻게 키울 것인지에 대해 말했다. 오이카와는 전혀 관심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오이카와가 오메가여서인지 아니면 그의 영업용 미소에 경계를 풀어서인지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 우시지마의 가족계획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오이카와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곤혹스러웠지만 고객의 기분을 맞추는 건 영업사원의 기본 소양이었으므로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 쳤다.
오이카와가 계약을 마무리하고 떠난 이 집에서 우시지마가 할 일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 마치 영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가족을 꾸리는 것뿐일 터였다. 오이카와가 이렇게 다시 불려올 이유는 없었다. 만약 공사에 하자가 있다면 사무실로 연락이 갔을 텐데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에게 직접 연락을 해왔다. 사장이 알아서 달가울 건 없을 거라고 말한 그의 말에서 문제를 유추해 낼 순 없었지만 그대로 사장에게 보고 해 일이 귀찮아지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오이카와는 다른 고객과의 약속을 핑계 대고 이곳으로 왔다.
“이 벽지는 어떠세요? 무늬의 진주빛 광택이 사모님의 마음에도 들 것 같아서 샘플을 가져왔어요.” 라고 오이카와가 권한 벽지가 발린 벽이 익숙하게 눈에 다가왔다. 공사가 마무리되고 한 달 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오이카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대로였다. 벽에 걸린 시계, 그림, 장식장 위의 작은 액자들과 화병까지. 가구와 소품들은 마치 그 자리에 박제 된 것처럼 그대로였다. 바뀐 것은 화병에 꽂힌 꽃뿐인 듯했다.
그것이 어딘가 답답해 오이카와는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아서일 거라고 생각하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들고 셔츠의 가장 위 단추를 풀었다. 그 손가락 위로 다시 우시지마의 시선이 기어갔다. 무거운 공기가 압박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오이카와는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이사 오지 않은 거야?”
무슨 말이라도 해야 좀 나을 듯했다.
“정리를 하려면 몇 달 더 후일 것 같다.”
“뭐야. 그럼 시간 좀 넉넉하게 주지 그랬어. 엄청 바쁘게 움직였잖아.”
“아니, 그쯤 마무리 된 것이 알맞다.”
“그래? 뭐 준비 더 할 거 있어?”
“그렇다.”
“흐음…. 더 들일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기 방도 다 꾸며놨잖아? 유모도 입주 가정부도 들일 거라고 그 사람들 방도 만들었고. 부엌에도 빠진 건 없을 텐데?”
“일 처리는 잘 해주었으니 그쪽으론 문제가 없다.”
“그럼 뭐야? 그것 때문에 부른 거면 빨리 말 해. 오늘 바로 퇴근할 거라고 했으니까 일찍 가서 이와쨩이랑 맥주라도 한잔 하고 싶다구. 요즘 계속 바빴단 말야.”
“약속을 잡았나?”
“아니?”
“다행이군.”
“설마 우시와카쨩. 오이카와씨를 늦게까지 부려먹을 셈이야?”
“글쎄.”
“똑바로 이야기 하라고.”
이 더운 날 사람을 오라 가라 하고선 제대로 말을 하지 않는 우시지마의 태도에 짜증을 느낀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집에 부족한 것이 하나 있지.”
“뭔데?”
우시지마가 한 걸음 오이카와에게 다가왔다. 그의 강한 페로몬은 두 걸음 더 다가와 오이카와를 덮쳤다. 오이카와의 눈이 커다랗게 변하자 우시지마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