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오이] 마지막 여름
마지막 여름
발간일 : 2016년 08월 14일 8회 디.페스타
커플링 : 마츠카와X오이카와 (전연령)
표지 일러스트 : 섶님 (@seoooop)
※ 책 사양
국판 인쇄 92페이지
※ 가격
8,000원
※ 주의사항
● 모, 세모 소설 트윈지입니다.
● 두편 모두 사망소재 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사망과 여름의 소실에 관한 주제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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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정의
MO
여름의 정의定義를 사전에서 찾는다면,
여름【夏】
계절의 두 번째. 봄과 가을의 사이로, 일본에서는 6·7·8월을 말한다. 달력상에서는 입하에서 입추 전날까지(음력 4월부터 6월까지)이며, 천문학에서는 하지에서 춘분까지를 여름으로 본다. 일 년 중 가장 고온·다습하며 해가 가장 길다.
-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해답을 구해도 대개는 비슷할 것이다. 저만큼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6월에서 8월쯤까지가 여름 아닐까?’라든가, ‘일 년 중에 가장 더운 계절이지.’ 하는 식으로. 물론 한 개념에 대한 정의란 사람마다 다르기 쉬운 것이니 더러는 특이한 답이 나올 수도 있겠다. 내가 지금껏 들어본 ‘여름의 정의’ 중 꽤 독특한 축에 속하는 답은 다음과 같다.
‘유난히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지면 그제야 여름이구나 싶더라.’
‘거실에 누워있으면 풍경 소리가 들릴 때.’
‘저녁 먹은 후 디저트로 수박이 나오기 시작하면.’
∴
한낮 햇살이 제법 따가워, 맨 피부에 볕이 닿자 땀이 살짝 맺혔다. 그 감각에 이제 곧 여름이 찾아오겠구나 생각했다 달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8월 중순이었다. 40도에 육박한 기온과 치솟은 습도에 숨이 막혀야 정상인 시기였다.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 옆에 붙은 온도계를 보았다. 26도. 다른 날에 비해 조금 더운 편이었다.
8년쯤 전까지만 해도 여름은 여름이었다. 바깥에 나가기만 해도 탄식이 터져 나왔고 에어컨 없이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여름은 봄과 가을의 일부마저도 잡아먹으며 그 기세를 한껏 뽐냈다. 하지만 만개 뒤에는 쇠락밖에 남지 않는다 하던가. 기후변화니 뭐니 하며 끝도 없이 뜨거워지던 지구는 한순간에 식어가기 시작했다. ‘시원한’ 여름이 두 해 정도 찾아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여름 최고기온이 30도조차 넘지 못했다.
그러다 여름이 아예 사라지리라는 예측이 나왔다. 기상학자들은 최근 몇 년간의 기후변화에 대해 설명하며 ‘앞으로 3년 후면 우리가 생각하는 여름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정확히 3년 전이었으니, 예측이 맞다면 내년부터는 가장 더운 날도 기온이 20도 안팎에 불과하게 될 것이었다. 한 차례 파란이 일기는 했지만 세상은 의외로 평온했다. 아주 빙하기로 들어서는 것도 아니고, 1년 365일 중 180일 정도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짜증나게 덥고 습했던 날들만이 사라지는 것뿐이니까.
즉, 지금 온도계가 가리키고 있는 26이라는 숫자는 올해를 끝으로 더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이 바로 위는 손님방으로 쓰고자 비워둔 방으로, 아까 전 암막커튼을 치고 에어컨을 틀어 아주 깜깜하고 서늘하게 만들어둔 채였다. 방 안의 상황을 생각하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번 들여다보고 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드라이아이스를 넣었으니 괜찮겠지?’
올해는 유난히 마지막인 것들이 많았다. 즐겨보던 TV 드라마 시리즈가 종영이 되었고, 중학생 때부터 매주 사보던 만화 잡지도 폐간이 되었다. 거의 30년 가까이 이어지던 게임 타이틀의 마지막 시리즈도 두 달 후에 발매가 예정되어 있었다. 작게는 그랬다. 크게는 말했듯 여름이라는 계절이 마지막이었고…….
9년을 사귀고 6년을 같이 산 오이카와가 세상을 떠났다.
우린 22살 때부터 함께 살았다. 차마 남자끼리 사귀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했기에, 몇몇 ‘주요인물’을 제외하면 모두 우리가 룸메이트인 줄만 알았다. 유난히 붙어 다니고 유난히 친한 그런 룸메이트. 같이 사는 동안 나는 나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네가 웬일이냐’는 이야기를 들었고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보다도 더 친한 친구가 생기다니 놀랍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둘 다 뭘 몰라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 오이카와와 사귀었던 순간부터 그 애랑 살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고, 오이카와에게 있어 나는 연인이었으므로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여전히 이와이즈미였다.
지금 살고 있는 2층짜리 단독주택은 작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며 물려받은 것이었다. 신혼부부들에게 세를 놓으려 지은 집이라 두 사람이 살기에는 아주 맞춤했다. 하여 세를 주는 대신 이 집에 터를 잡기로 하고 이사를 결정했다. 그게 4개월 전이었다.
처음 집을 보러 온 날 오이카와는 거실로 한가득 쏟아지는 햇빛을 보며 아주 기뻐했다. 녀석은 기지개를 쭉 켠 후 ‘역시 사람은 볕을 보고 살아야 한다’며-전에 살던 맨션은 볕이 잘 들지 않았었다-한참이나 해바라기를 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정원의 나무를 보았다. 무언가 과일이 열릴 것처럼 생겼는데 무슨 나무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아서였다.
터전이 바뀌었지만 크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우리가 적응해야 할 것은 새로 산 침대 매트리스의 푹신함, 부엌 찬장의 높이, 욕실 욕조의 깊이 같은 것밖에 없었다. 이사 오기 전 단독주택에서의 낭만적인 생활을 꿈꾸었던 것이 무색하도록. 디테일이 약간 바뀌었다 뿐이었지 굵직한 것들은 언제나와 같았다. 그저 오이카와와 같이 살고 있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름 전에 오이카와가 병원에 입원했다. 2층 계단참 전구가 영 시원치 않아 전구를 갈던 중 실족하여 계단에서 구른 탓이었다. 아주 치명적인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왼팔이 크게 부러져 수술을 해야 했다. 괜찮냐고 묻는 내게 오이카와는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안 죽었으니 됐다’고 답했다. 어차피 그는 오른손잡이였고 수개월의 시간이 흐르면 왼팔은 제 기능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굳이 상황을 비관할 필요가 없었다. 마침 활동하고 있던 실업팀에서도 은퇴하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전향한 채였다.
어쨌든 우리는 나름 큰 사고를 겪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상황의 변화에 당황하고 흔들리며 우왕좌왕하기에 우리 생활의 기반은 지나치게 안정되어있었다.
입원 3일차에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으며 오이카와는 아무런 문제없이 깨어났다. 마취 기운 때문에 약간 몽롱하고 지쳐있었던 걸 빼면. 그는 깨어나자마자 ‘네가 다섯 명쯤 있는 것 같다’며-시야가 흐려서 그렇게 보였다는 모양이다-실실 웃었다. 병동 간호사는 이렇게 마취에서 빠르게 잘 깨어난 사람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오이카와는 살면서 자신이 잔병치레 한 번 안 해본 건강체질이라며 또 다시 웃었다. 모로 보나 수술을 끝낸, 그리고 앞으로 최소 몇 달은 팔을 제대로 쓸 수 없을 사람의 태도라고는 볼 수 없었다.
총 여섯 명의 정원 중 네 명밖에 차지 않은 한산한 6인실은, 남향인 탓에 집 거실만큼이나 볕이 잘 드는데다 입원해있는 환자들도 건강한 축에 속했다. 모두들 커튼을 치고 서로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병문안을 온 누군가가 주스라도 놓고 가면 한 잔씩이나마 나누어 마셨고 언제나 즐거운 것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도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질 않아 소등시간이 될 때까지도 침묵이 찾아오는 순간이 없었다. 그 안에는 어떠한 죽음이나 병마의 그림자도 없었다. 아무도 그 병실에서 누군가가 시신이 되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상태가 급변하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갑작스레 구토를 하더니 호흡이 빨라졌다. 수술한 곳이 복강 내의 어느 장기였더라면 명백한 위험신호였겠으나, 팔을 수술한 것이라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그냥 아까 전 먹은 빵이 좀 얹혔겠거니 했을 뿐. 바로 옆 침대의 나카타니 씨는 ‘내가 빵을 괜히 줬다’며 아주 미안해했다. 오이카와는 침대 헤드에 기대고 누워 그녀의 탓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것은 오이카와가 이 곳이 병실인지 집인지 헷갈려하고, 나를 나카타니 씨라 칭하고 맞은편의 마츠이 씨를 ‘맛층’이라 부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급하게 의료진이 몰려와 체온과 맥박, 혈압을 잰 뒤 혈액을 채취해갔다. 잠시 후에 나온 진단결과는 패혈증이었다. 어느 루트를 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술부위에 감염이 일어났다는 모양이었다.
원인균을 찾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탓에 여러 종류의 항생제가 우선적으로 투여되었다. 그럼에도 듣는 것이 없는지 오이카와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어갔다. 진단 하루 후에는 중환자실로 병실을 옮겼으며 이틀 후에는 신장투석을 시작했다. 나는 휴가를 내고 감옥만 한 보호자 대기실에서 하루 반을 보냈다. 상황이 놀라우리만치 바닥으로 떨어졌건만 이상하게도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일찍 발견했고,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고, 오이카와는 평생을 건강하게 살아왔으니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한 게 나뿐만은 아니었다. 잠시 면회를 온 이와이즈미도 침착했고, 미야기에서 내려온 오이카와의 형, 키요시 씨도 지극히 덤덤했다. 그는 내게 자신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 잠시 집에 다녀오라며 휴식을 권했다. 그때까지도 일말의 불안이 없었던 나는 가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병원을 떠났다.
먼 길을 온 키요시 씨를 열악한 보호자 대기실에 둘 수는 없었다. 하여 가볍게 샤워를 한 뒤 옷만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기로 생각했다. 병원에서 집까지 왕복 40분, 씻고 채비를 하는데 1시간, 도합 1시간 40분. 짧은 시간이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샤워기 아래에서 따듯한 물을 맞으며 하루 반 동안 쌓인 찜찜함과 피로를 전부 풀어냈다. 편안했다. 몸이 덥혀지자 노곤하니 잠이 쏟아져 30분만 눈을 붙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그렇게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나와 시간을 확인할 겸 본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가 10통도 넘게 쌓여있었다. 병원을 떠나오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별 일이야 있겠어.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키요시 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내가 묻고서야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토오루가 10분 전에 세상을 떠났네.
그 말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든 생각은 ‘대체 갑자기 누가 죽었다는 거지?’였다. 그가 말하는 토오루가, 9년을 사귀고 6년을 같이 산 내 연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 옅은 통곡소리를 듣고서였다. 뭐라 소감을 말할 수도 없이 갑작스러운 사별이었다. 어안이 벙벙하지도 않고, 두들겨 맞은 것 같지도 않고, 너무 갑작스러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만치.
곧장 병원으로 갔으나 병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이나 복도를 서성댔다. 연락을 받고 찾아온 이와이즈미가 나를 발견하고 함께 들어가자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안에 들어가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는데. 그런 생각밖에 없었다. 거기 있는 그 무엇도 전해 듣고, 확인하고, 느끼고, 실감하고, 납득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전신마취를 하고서도 벌떡 일어났던 애가 갑자기 패혈증에 걸렸다 하더니, 하루 만에 중환자실로 옮겨가고, 이틀 만에 신장투석을 받고, 사흘째에 심부전인지 신부전인지로 숨이 끊어지다니. 아주 거대하고 악의적인 거짓말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불쾌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마저도 누군가가 나를 골려먹기 위해 꾸민 쇼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악질적인 무대의 연출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참가자도, 관람객도 되고 싶지 않았다.
현시점에서 ‘가장 가깝다’고 볼만한 내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으므로, 그 후의 과정들은 전부 키요시 씨가 도맡았다. 나는 한 단계의 끝이 날 때마다 전화로 보고를 받았다. 통보 식으로 마무리되던 어미가 의문형으로 끝난 것은 장의사가 찾아온 시점에서였다. ‘장례식은 어디서 할 것인가.’ 키요시 씨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럼 장례를 장례식장에서 하지 어디서 하나요. 물론 집에서 장례를 치른다는 선택지도 있기야 했지만 그 번거로움을 감당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장례…….”
입술을 움츠린 순간 불현듯 어느 하루가 떠올랐다.
수술 이틀째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오이카와는 앞자리 마츠이 씨와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보호자용 침대에 걸터앉고서야 내 방문을 눈치 챘다. 눈이 마주치자 오이카와는 늘 그랬듯 눈꼬리를 휘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를 따라 웃고 ‘이러다 퇴원 날 집에 가기 싫다고 우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오이카와는 에이, 하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집에 가고 싶은데.’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장례는 집에서 치르죠.”
그렇게 말하고 곧장 전화를 끊었다. 답변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정말 괜찮겠나, 다시 신중히 생각해보는 건 어떻겠나. 그런 말을 듣는 순간 곧장 무너질 결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호흡이 가빠지며 심장이 마구 뛰었다.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장의사와 키요시 씨와 오이카와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정원으로 향하는 유리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바깥 풍경만 보았다. 그렇게 하면 현관 쪽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등질 수 있었다. 키요시 씨는 장의사를 2층으로 안내했다. 위층에서 드라이아이스를 채운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모른다며 커튼을 치는 소리와, 에어컨을 켜는 소리도. 계단을 내려온 장의사는 곧장 집을 떠났다.
나는 앞으로는 정원에 심어둔 토마토를, 뒤로는 키요시 씨를 마주했다. 그는 들어왔을 때 그랬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종알종알 시끄럽던 동생과 달리 과묵한 사람이었다. 나로부터 이야기가 나올 것을 기대했을지, 아니면 이 판국에 동생의 남자 애인을 마주하는 것이 거북했을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키요시 씨가 말 한 마디 없는 나를 이해해주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등 뒤의 시선에 한심함이나 분노는 섞여있지 않았다. 측은지심만이 있었을 뿐. 그렇게 동정만 가득했던 침묵 끝에 또 다시 통보가 날아왔다. 납관사는 내일 오전에나 온다는 것이었다.
그게 오늘 아침 일이었다. 여덟 시간이나 흐른 지금도 나는 여전히 거실에 앉아있었다. 2층으로는 올라가보지도 않았다. TV를 보다 소파에서 잠깐 잠을 잤고, 그 후로는 계속 정원만 쳐다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문득 오늘 하루가 ‘오이카와가 없는’ 하루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나는 아무런 약속도 없는 것에 반해 오이카와는 누군가와 약속을 잡고 일찍이 외출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2층에 올라가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오이카와는 저녁이면 돌아올 터였다. 2층에서 잠을 자거나, 휴대전화를 보며 뒹굴고 있으면 곧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움이 싹 가시며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맨바닥에 한참을 앉아있던 탓에 근육이 당기고 뼈마디가 아려왔다. 거실을 가로질러 2층으로 향하는 계단참 앞에 섰다. 유니버셜 디자인이니 뭐니 하는 걸 신경 쓴 집이 아니라 계단은 꽤 가파른 편이었다. 아래에서 보면 올라갈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까마득했다. 여기서 굴러 떨어지고도 팔만 부러지다니 대단해. 계단 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단하달까, 재수가 좋달까……. 나는 발밑을 보았다. 재수가 없었더라면 아마 여기 이 자리에서 즉사했을지도 모르겠다.
“…….”
등 뒤로 무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속이 답답해졌다. 이번에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주방과 거실 쪽을 번갈아서 보았다. 부재중인 관계로 오이카와의 모습은 없었다. 그가 있었더라면 ‘야, 너 여기서 떨어지고도 안 죽은 게 용하다’ 하면서 혀를 찼을 텐데. 그러면 뭐든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안 죽어서 섭섭하냐고 톡 쏘든, 자기도 신기하다며 동조를 하든.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로 생각을 끝내자니 찜찜함만 가중되었다. 다시 계단참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높고 경사졌다.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올라갔다. 올라가서 바로 정면은 손님방이었고 우측으로는 짧게 복도가 나있었다. 나는 복도 쪽으로 향하려다 말고 손님방 문과 마주보았다. 평상시 잘 들어가지 않는 곳이라 남의 집 문인 양 어색했다.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이며 문고리를 흘끔댔다. 안에서는 에어컨이 작동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못 들어갈 게 뭐 있나 싶어서 문고리를 붙잡고 돌렸다.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렸다. 방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열린 문틈으로 냉기가 스멀스멀 새어나왔다. 반소매 밑으로 드러난 피부에 소름이 돋으며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조금 더 문을 열어보았다. 그 순간 방 안으로 빛이 새어 들어가며 이불 위에 누운 무언가의 실루엣이 비쳤다. 이불을 덮고, 얼굴 위로는 흰 천을 덮은 사람의 그림자.
황급히 문을 닫았다. 오한이 들며 손끝이 움찔거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 천천히 막아두었던 숨을 내쉬고 계단을 내려갔다. 고장 난 로봇처럼 팔다리가 어색하게 나갔다. 문틈으로 느낀 잠깐의 냉기에 온 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혹시 서리라도 낀 것은 아닐까 싶어 손을 보았다. 당연하지만 멀쩡했다.
계단을 내려오자 등 뒤로는 2층이, 우측으로는 부엌이 위치하게 되었다. 새삼스러운 계산이었다. 지금껏 이 집에 살면서 좌측에는 뭐가 있고 우측에는 뭐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면서 필요에 따라 문을 벌컥벌컥 열고 다녔지. 그런데 오늘따라 놀랍도록 다른 공간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다 내가 아는 곳이고 내게 권리가 있는 곳인데도.
다시 한 번 등줄기로 소름이 쫙 돋았다. 반쯤 뛰듯이 거실로 향했다. 적어도 지금, 2층은 내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었다. 발이 엉켜 몸이 크게 휘청댔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후다닥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한낮 햇빛 아래 서자 몸이 따듯해지며 조금씩 안정이 찾아왔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정원 쪽을 보았다.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가 햇살 아래 표면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뭐였을까.
마치 계단을 사이에 두고 1층과 2층이 냉전을 치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까 전 목격했던 실루엣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쳤다. 그 순간 또 다시 머리털이 쭈뼛 섰다. 에어컨조차 틀지 않은 곳에서 몸을 떨고 있자니 후회가 막심했다. 마른세수를 하다 멈추고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나는 이 집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데…….’
여기로 이사를 오면서 집 보수를 하고, 가구와 가전 몇 개를 새로 산지라 꽤 큰돈을 썼다. 이 집에서 못해도 15년은 더 살 생각으로 지출한 비용이었다. 고작 스물여덟밖에 되지 않은 내가 모아둔 돈이 많아봐야 얼마나 있었겠는가. 지금 당장 이사를 나갈만한 비용은 남아있지 않았다. 즉 못해도 이 집에서 몇 달은 더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또 후회가 밀려왔다. 집 보수도, 집기도 살면서 천천히 고쳐나가면 좋았을 텐데…….
결혼한 셈 치고 쓰면 되지.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견적서를 보고 한참이나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었다. 결혼했다 생각하고 쓰는 거면 그렇게 큰 지출도 아니라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물 초반의 이야기였으면 어려서 뭘 몰랐구나 했을 텐데. 뺨을 감싼 손을 놓고 다시 천장을 보았다. 까마득하게 보였다. 정말 결혼을 하는 데 썼더라면 차라리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후략 ================
※ FHQ 요소가 있습니다.
무언가(無言歌) - Vocalise
SEMO
나는 ‘내가 미쳤나.’ 라고 눈으로 말했나. 나는 그 말에 대한 대답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나의 몸짓이 말하는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알아듣지 못한 척 하는 대신 불만에 찬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내가 아는 진실에 쇄기를 박기 위해 침묵을 고수하는 나 대신 입을 열어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오이카와가 죽어야 네가 살 수 있어.”
정확하게는 ‘세상’이지만, 박애주의와 거리가 먼 나에게 그 단어가 마음에 닿을 리 없으니 나는 인류라는 말 대신 나를 지칭하는 ‘너’라는 단어를 택했다.
나는 ‘이런 건 믿을 수 없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내가 그 사실을 정확히 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내 손가락이 악기의 현을 누르고 활을 켜면 여지없이 나무로 된 몸통이 울며 두 개의 틈으로 소리를 내보내는 것처럼 내가 지금 막 알게 된 것은 의지를 필요로 하는 믿음이 아니라 왜 라는 물음조차 필요하지 않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죽음이 세상의, 보다 정확히는 전 우주의 아주 미비한 크기인 태양계에 속한 작은 행성의 절멸을 막을 수 있다.
나는 그 절망에 직면한 반응을 비통한 울부짖음 대신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눈을 끔벅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나는 눈앞의 나를 보며 ‘세상 귀찮아하는 얼굴이 꼭 나 같네.’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나야.’라고 말하는 대신 나와 같은 속도로 느릿하게 눈꺼풀을 끔벅끔벅 움직였다.
“오이카와가 안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모든 계절이 사라지고 결국엔 멸망하겠지.”
“멸망하면 오이카와도 죽는 거 아니야?”
“맞아. 오이카와만 죽느냐 오이카와도 죽느냐의 차이지.”
“이래도 저래도 죽을 거면 그냥 같이 죽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귀찮게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생각하는 나의 얼굴 바로 앞에 내 얼굴을 들이밀었다. 역력히 당황하면서도 나는 얼굴을 조금 뒤로 물릴 뿐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나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알려주었다. 세상이, 오이카와가 죽지 않는 방법.
“네가 죽으면 돼.”
“뭐?”
“그러면 오이카와도 살고 세상이 멸망하지도 않지.”
내가 이 세계의 언어로 말했기에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거짓이 되진 않았다. 나는 나의 죽음이 불러올 미래에 대해 궁금해 하는 나를 위해 조금 말을 덧붙였다.
“일 년.”
“일 년?”
“일년 안에 네가 선택하는 하나의 계절과 네 목숨으로 오이카와를 살릴 수 있지.”
나는 되묻는 대신 미간을 좁혔다. 똑같은 얼굴의 미친놈을 보는 건 별로라고 생각하는 나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나와 똑같이 생긴 무언가가 헛소리를 한다면 기분이 더러울 테니까 나의 그런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기에 나는 또 다른 정보를 말했다.
“오이카와는 너와 네가 죽는 계절을 영영 잃는 대신 남들처럼 살다 죽을 거야. 그냥 너만 오이카와의 인생에서 사라지면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죽는 거지. 아, 물론 계절이 하나 사라지는 건 큰일이겠지만 다들 적당히 적응할걸.”
그렇잖아도 비죽이 나온 입술이 더 앞으로 튀어나왔다. 오이카와가 “좀 집어넣으라구!”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꾹꾹 입술을 눌러댔던 것엔 저런 이유가 있었다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저 표정은 거울로도 볼 일이 잘 없으니 오이카와가 저런 내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몰랐다. 내가 봐도 썩 좋게 보이지 않는 표정을 지울 생각을 하지 않는 나는 머릿속에 가득 불만을 채우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죽으면 세상이 멀쩡하고, 오이카와가 안 죽으면 다 같이 망하고, 내가 죽으면 대충 어떻게든 남들은 산다는 거야?”
“응.”
“개떡 같네.”
‘사는 건 늘 개떡 같지.’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지금 이 사실을 알게 된 본인보다 세상의 어느 누가 불행하겠는가.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으켰던 몸을 의자에 다시 주저앉혔다.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악기를 끌어안으며 턱으로 대각선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실체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나는 의자에 앉는 대신 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나는 오이카와에게 선택권을 줄 생각이 없어.”
나는 내 말이 갑작스러워 눈을 크게 치켜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니 나의 반응이 놀랍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이 ‘왜 오이카와가 아니라 자신에게 이 문제를 결정하게 하는가.’라는 타당한 의문에 대한 답이라는 걸 알아차리는데 나는 잠시간의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고 결국 의미를 받아들이게 되자 나는 한 손으로 악기를 안은 채 남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말도 안 돼. 이런 게 어딨어.’라고 속으로 말하는 나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었다.
“일 년이야. 그 안에 결정하지 못하면 다 죽는 거야.”
‘그럼 니가 하든가!’라는 말 대신 사정없이 얼굴을 구기는 내 앞에서 나는 천천히 나의 가시적인 모습을 지웠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는 건 좀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이내 내가 사라진 현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멸망과 자신의 죽음, 오이카와의 소멸. 어렵지 않은 몇 개의 단어들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나는 당연히 내가 단 몇 시간 만에 이 문제의 답을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맛층은 신중한 게 아니라 굼뜬 거라구.’라고 하던 오이카와의 말처럼 말이다.
나는 잔뜩 날이 선 신경을 수습하지 못한 채 오른 손에 든 활을 현으로 가져갔다. 손의 떨림을 따라 활이 흔들렸다. 퉁퉁 의도하지 않은 소리가 작게 비져나왔다. 나는 왼손으로 깊게 현을 눌렀다. 길게 활을 당기자 악기의 뱃속에 든 공기가 울려 홀을 빠져나와 소리를 만들었다. 무의미한 음이 하나, 손가락이 옮겨간 다음 현과 그 현을 켜는 활이 만들어낸 또 다른 음이 하나. 음과 음이 연결되어 곡을 만들어갔다.
솔직할 정도로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는 무거운 소리에 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오이카와처럼 큰 소리로 웃진 않겠지만 비탄에 찬 나를 비웃기엔 충분한 소리는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웃는 대신 울고 있는 악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무엇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당연히 나는 실재하지 않으므로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나는 이미 외우고 있는 악보를 애써 하나하나 그리듯 머릿속에 떠올렸다. 규칙적인 음계를 가지고 이동하는 작은 동그라미들의 이동을 따라 기계처럼 현을 누르고 활을 켰다. 지루한 동작의 반복을 지겹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갑자기 주어진 선택을 뒤로 미루기 위해 그 단조로운 악보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머릿속에 그려진 악보의 속도와 실제 현의 속도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현을 누르고 이동하는 속도도 덩달아 빨라지고 통을 울리던 소리에 어느새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그러던 한 순간 나는 활을 악기에서 떼어냈다. 허공을 보고 한숨을 쉬고 오이카와의 모습을 떠올렸다. 피로가 역력한 얼굴, 살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 나는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이번엔 얼마 전에 지나간 오이카와의 생일날을 생각했다.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얼굴 답례라며 입술에 키스해주며 웃는 얼굴. 나는 눈을 감고 다시 현 위로 활을 올렸다.
Lentamente 느리게. molto cantabile 노래하듯이.
악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곡이 머릿속에 악보를 그리는 것보다 먼저 손을 움직이게 했다. 말 그대로 셀 수 없을 만큼 연주해서 이제는 눈감고도 손을 움직일 수 있는 곡. 나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악기를 켜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언어가 없는 소리로 끊임없이 자문했다. 아직 답을 낼 용기가 나지 않는 주제에 관해 끊임없이 물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대신할 수 있을지.
생각이 많아질수록 손은 악보와 다르게 흘러갔다. 조금 빠르게 poco piu mosso 라고 떠올리면서도 현이 울리는 소리는 자꾸만 느려졌다. 지나치게 강한 힘으로 누른 탓에 도리어 손가락이 현에서 미끄러졌다. 다음 음계를 짚는 손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결국 나는 곡의 마지막에 이르지 못하고 손을 내렸다.
완성되지 못한 곡. 그것은 자연스레 나에게 요절한 천재 음악가의 미완곡을 떠올리게 했다.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듯 완성하지 못한 진혼곡.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시 소속 관현악단 첼리스트 주제에 어디다 비유하냐고 자조적인 생각을 하며 다시 현을 움켜쥐었다.
바로 내일 멸망하는 것도 아니니 생각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나는 보면대 위 악보를 넘겼다. 일 년 뒤에 있을 세상의 멸망보다 당장 다음 달 예정인 정기공연이 더 중요했다. 비현실적인 사실을 믿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나의 고민은 정신과 치료를 권할만한 것밖에 되지 못했다. 그런 것을 빌미로 실업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무덤덤하게 손을 움직여 악보에 그려진 음으로 울었다.
나는 아직 죽음을 생각하기에 이른 나이이기에 그것은 언제나 피상적으로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하지만 죽음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죽는다. 오이카와가. 죽는다. 내가. 혀를 움직이는 대신 나는 나의 악기로 말했다. 죽음을 앞둔 이의 불행에 취하기 위해 한껏 감정을 담아 다리 사이에 둔 악기를 끌어안았다.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언제나 함께 있었던, 수차례 바뀌긴 했으나 그 이름만은 그대로인 첼로. 나는 한 때 이것이 내 목숨만큼 중요하다는 얄팍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친애하는, 아니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감정을 나누게 된 오이카와와 처음 입 맞추었을 때에도 나는 오이카와보다 이 악기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와의 시간은 과거가 될 수 있지만 평생을 함께 해온 내 언어의 대변자는 죽음이 내 육체를 돌로 만드는 그날까지 나와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인생은 거창한 것이며 자랑할 만한 재능을 가지지 못한 나에게도 이것만은 첫 번째 저승의 강에 다다를 때에 내 삶의 모든 것이었다고 말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내가 다시 손을 멈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통의 강을 건너는 뱃삯을 내는 대신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원할지도 모를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속으로 웃는 나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마치 그 얼굴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내 안의 형상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나의 오이카와는, 감히 소유격을 붙일 수 없는 오이카와와 달리 검은 뿔도 붉은 눈동자도 소유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오이카와와 똑같은 개암색 머리카락은 그의 두상을 따라 그저 매끄럽게 굽이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색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휜 눈꺼풀 아래에 자리했다. 누구보다 강하고 고귀하며 차가운 붉디붉은 눈동자와 달리 사랑스럽고 온화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다시 현을 짚었다. 갑자기 제 인생에 닥친 크나큰 불행을 과장된 몸짓으로 조소했다. 현을 누른 손가락이 검은 지판 아래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현을 끊어 더 이상 소리를 내고 싶지 않은 것 마냥 깊고 깊게 현을 짚었다. 활을 쥔 손이 떨렸다. 나는 내가 몇 마디를 연주하지 못한 채 다시 손을 놓을 거라 생각했다.
“맛층. 무슨 일 일어?”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묵묵히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방문이 열리고 그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고서야 손을 놓고 그를 돌아보았다. 내 머릿속에 그려진 오이카와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의 그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누가 들어도 거칠고 신경질적인 음색을 오이카와가 모를 리 없었다. 오이카와는 나와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나는 조금쯤 오이카와가 자신의 심경을 눈치채주길 바라고 있었다.
“아니.”
비록 거짓뿐인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오이카와가 나에게 떠안겨진 선택에 관해 알아주기를 바랐다.
“악장이 뭐라 한 건 아니고?”
깐깐하고 욕심 많고 자존심 강한 반백의 남자를 떠올린 나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이카와에게 성토하는 직장에서 얻어오는 불만의 반수 이상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그 남자임은 틀림없지만 지금의 내가 무언으로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토하는 것은 그 남자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오이카와는 “근데 왜 그렇게 험하게 연주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 온도를 낮췄다.
“맛층 덥지도 않아?”
“아….”
“아가 뭐야 아가. 맛층 진짜 은근 둔하다니까. 더워죽겠구만.”
“일 년….”
“뭐?”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던 오이카와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악기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 생일.”
“오이카와 씨 생일 일주일 밖에 안 지났는데 왜? 벌써 주고 싶은 선물이라도 생겼어?”
“어.”
오이카와는 정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따듯한 색조의 눈동자가 온전히 둥글게 떠올랐다. 그 눈동자를 안타깝게 보는 나의 시선을 통해 나는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유심히 볼 수 있었다.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이었다. 내가 아는 오이카와와 도무지 같은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맛층 뭐 잘못 먹었어?”
“선물 준다는데도 싫어?”
“선물 주고 싶으면 그냥 주면 되지 뭘 생일이네 뭐네 따지는 거야. 내년이 특별한 해도 아니잖아?”
내년은 연인이 된지 6년 째, 내가 오이카와의 생일을 알게 된지 11년 째 되는 해였다. 그의 말대로 특별히 의미를 붙여 축하할만한 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이카와의 관점에서 볼 때이지 나에게 있어서 올해 아니면 내년 오이카와의 생일이 나와 오이카와가 함께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니 특별한 해가 아니라고 말할 순 없었다.
나는 악기를 고쳐잡으며 오이카와를 향해 그래도 이야기해보라고 눈으로 물었다. 오이카와는 나의 질문에 고민하는 듯 손으로 턱 아래를 긁었다.
“음…. 아직 잘 모르겠는데? 생각나면 말 하면 안 돼?”
“그래.”
“맛층, 진짜 아무 일 없어?”
“없어.”
“거짓말 하지 말고.”
“없다니까.”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나는 눈치가 좋은 오이카와가 나의 행동에서 위화감을 느낀다는 걸 알면서도 정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집요하게 묻는 대신 입을 닫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 대신 온화한 갈색 눈동자가 여러 가지를 물었다. 나와 나의 오이카와가 인간의 시간으로 치자면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할 수 있는 두 사함만의 대화방식이었다. 두 사람이 태어나 살아온 시간을 합한 세월의 열 배도 넘는 시간을 보낸 내가 아는 오이카와, 마계의 주인이자 나의 왕인 오이카와의 의중을 여전히 읽을 수 없는 나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나는 한쪽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다시 말했다. 오이카와는 말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눈으로 말했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하는 대신 현을 짚었던 손으로 오이카와를 불렀다. 오이카와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그런 오이카와의 얼굴을 감싸 잡아당겨 그의 입술에 입 맞췄다. 오이카와는 제 얼굴을 덮은 나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어 어루만졌다. 나는 오이카와의 입술에 입술을 뒤덮은 채 ‘좋아해.’라고 읊조렸다. 소리가 없어도 단어는 전해졌는지 오이카와는 눈을 감으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꼭 눌러 붙여왔다.
손을 들어 내 입술을 더듬었다. 내 입술에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만약 오이카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댈 수 있다면 그의 입술에서 무언가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나의 오이카와가 아니라 내 세계의 왕좌에 앉은 오이카와에게 말이다. 그의 입술은 내 세계의 시작부터 타올라 세계가 끝나는 날까지 꺼지지 않으리라는 왕좌를 둘러싼 새빨간 불꽃만큼이나 뜨거울 것 같기도 했다.
나와 오이카와가 오래도록 입 맞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나의 감정이 고스란히 나에게 흘러들어왔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나다웠다. 결국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을 텐데도 미루고 다시 뒤로 미루어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위안을 할 게 분명했다. 그것이 오이아카와의 생명을 빼앗아 내가 사는 길이든 스스로 죽음을 택해 오이카와의 삶을 존속하게 하는 길이든 결국 무엇을 택해도 후회밖에 남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피일차일 미룰 것이 분명했다. 내가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선택지가 나에게 주어졌을 때 나 역시 같은 행동을 하리라는 것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오이카와의 입술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오이카와를 놓아준 손으로 다시 악기의 목을 쥐었다. 현과 함께 지판을 누르고 한숨과 함께 현을 당겼다. 신 같은 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신을 위해 만들어진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보에와 성악의 선율을 내가 쥔 악기를 위한 곡으로 편집한 음은 시종일관 같은 문장을 읊조렸다. Ich habe genug 나는 만족합니다. 라고.
========== 후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