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환타지풍으로?
The Crwon
아오바죠사이의 젊은 왕 오이카와는 쿠미니가 가지고 온, 가히 청천벽력이라 할 만한 소식에 눈을 크게 떴다. 북의 시라토리자와의 왕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생포. 그 기적 같은 일을 그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동북 대륙을 나누어 가진 네 개의 왕국. 동쪽의 카라스노, 서쪽의 다테, 남쪽의 아오바죠사이, 북쪽의 시라토리자와. 그 중 가장 넓은 영토와 국력을 가진 시라토리자와를 지배하는 강력한 왕권의 우시지마는 동북 대륙을 넘어 다른 곳에서도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우시지마가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무너졌고 아오바죠사이는 어부지리로 시라토리자와의 왕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했다. 오이카와는 연이은 쿠니미의 설명에 현실을 받아들였고 곧장 우시지마의 오른편을 지키던 남자를 떠올렸다.
“과연, 그 빡빡이 그런 인상이긴 했는데.”
시라토리자와의 대장군, 왕의 오른팔. 모두 그의 충심을 칭찬했으나 오이카와는 처음부터 그 남자라면 언제든지 왕을 향해 이를 들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우시지마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린 것인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시지마가 있다는 알현실로 발을 옮겼다.
우시지마가 시라토리자와의 왕이 된 삼 년 후 오이카와는 아오바죠사이의 왕위에 올랐다. 오이카와가 왕이 되기 전엔 종종 얼굴을 마주칠 일이 있었는데 왕위에 오르고 나선 대면으로는 처음이었다. 거의 일 년만에 보는 그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지 기대하며 오이카와는 자신의 왕좌에 앉았다.
과연, 이라고 할지. 포로가 되어도 우시지마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왕의 풍모를 지울 수 없는 당당함과 냉혹한 표정은 분명 오이카와가 단 위의 왕좌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자로서 아오바죠사이의 대표로 시라토리자와의 왕 앞에 섰을 때처럼 위치가 반대인 것만 같았다.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을 일그러뜨리려 비죽이 웃은 오이카와는 천천히 우시지마를 훑어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 다른 것이라면 자줏빛 망토 대신 몸을 감싼 질 낮은 천 옷과 황금의 팔찌 대신 손목에 채워진 족쇄 정도였다. 오이카와를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였다.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는 거야? 우시와카쨩.”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매번 만날 때마다 똑같은 패턴으로 시작하는 대화에 오이카와는 빙긋 웃으며 다시 한 번 우시와카쨩. 이라고 말해주었다.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싫은 얼굴을 하는 우시지마를 보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우시와카쨩은 이제 오이카와씨의 포로잖아. 내가 마음대로 부를 권리 정도는 있는 거 아냐?”
우시지마는 대답대신 입술을 굳게 닫았다. ‘재미없네.’ 라고 중얼거린 오이카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믿어지지 않게도 시라토리자와에서 일어난 반역이 성공한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일단 악연으로 이루어진 사이라 해도 한 나라의 국왕인 우시지마의 지위에 걸맞은 방으로 그를 안내하라고 했다. 우시지마가 족쇄가 채워진 팔을 들어 올렸으나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풀어줬다간 당장 알현실을 장악하고 탈출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우시와카쨩이 얌전히 굴 생각이 들면 풀어줄게.”
“약속하지,”
“즉답이라서 안 믿겨.”
속으로 누구부터 목을 딸까 계산하는게 다 보이는데 그 말을 호락호락하게 믿어줄 순 없었다. 오이카와가 손짓하자 병사들이 우시지마를 데리고 알현실을 나갔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반역이 성공했다면 그의 신변을 인수하고 있는 것이 그리 호재로 작용할 것 같진 않습니다. 분명 소식이 들어가면 요구해 올 텐데요,”
“에, 이와쨩, 머리 쓰면 열 나.”
“폐하!”
우시지마의 그 눈빛 나쁜 대장군과 달리 오이카와에게는 믿을 수 있는 오른팔이 있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입은 좀 험하지만 오이카와에겐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도 믿을 수 있는 단 한사람이었다. 그러니 우시지마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이 왕좌에서 끌어내려질 일은 없었고 그 확신은 오이카와에게 묘한 우월감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발끈하는 이와이즈미를 내버려두고 오이카와는 이 즐거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시지마의 신상을 패로 삼아 새로 시라토리자와의 왕이 된 이와 아오바죠사이에게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바가 없을 테지만 왕이 성격을 잘 아는 그의 신하들은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진 못하리라는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챘다.
그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오이카와는 한참동안 뭔가를 생각하더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자신이 보기엔 쓸데없는 장식이 많은 화려한 방 안에 선 우시지마는 노을의 붉은빛이 점점 검게 변하는 것을 창을 통해 보고 있었다. 포로를 가두기엔 적당하지 않은 2층. 우시지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미세한 움직임으로 실소했다.
“얌전히 있었어? 우시와카쨩.”
들려온 목소리보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뒤로 돌아선 우시지마는 족쇄로 인해 불편한 팔을 들어올렸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우시지마의 얼굴에서 한 번, 족쇄로 인해 붉게 쓸린 손목에서 한 번 머물렀다. 그리곤 손을 들어 열쇠를 보여주었다. 우시지마가 팔을 앞으로 내밀자 가까이 다가간 오이카와는 열쇠 대신 불쑥 자신의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기 말야. 우시와카쨩. 부탁이라는 걸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어?”
“왕은 부탁하지 않는다.”
“우시와카쨩은 지금 시라토리자와의 왕 아니거든?”
“내가 살아있는 한 내가 곧 왕국이다.”
내일 아침이면 해가 뜰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말하는 우시지마를 보며 오이카와가 웃었다.
“그거 알아?”
족쇄를 풀어주며 여전히 웃는 눈으로 우시지마를 보며 말하는 오이카와의 질문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졌다.
“우시와카쨩이 어떤 눈으로 날 보는지 알아?”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눈동자 속을 깊숙이 파고들 듯 한걸음 더 다가갔다.
“날 범하고 싶어서 안달 난 눈. 다리를 벌리고 억지로 범하고 또 범해서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눈이지.”
오이카와는 눈 끝을 접으며 웃었다.
“너야말로.”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그러하듯 똑바로 그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거의 입술이 마주 닿을 정도가 되도록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난 너와 같은 눈을 잘 알고 있다. 오이카와. 창부처럼. 남자를 원하는 눈이지.”
닿지 않아도 숨이 섞이는 듯했다. 우시지마는 미세하게 떨리는 오이카와의 속눈썹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안달내지 말고 기다려라. 난 자비로운 왕이니까. 내 것이 된 네 왕좌에서 네가 원하는 대로 범해주지. 자비로운 왕이시여. 부디. 가련한 당신의 노예를 용서하시길. 이라고 네가 빌어도 그 음탕한 구멍이 다시는 남자를 원하지 못할 정도로 범해줄 테니까.”
우시지마의 웃는 얼굴은 아주 사소한 변화로만 나타났다. 하지만 그의 말이 진심이고 그가 그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경련이 이는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더 이상 가까워 질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입술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결코 맞닿지는 않는 그 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이번에는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우시와카쨩야말로 내가 할 소릴 하는 게 아냐.”
가볍게 휜 눈매를 따라 옅은 색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짓궂은 미소가 반짝이는 눈에 가득 찼고 그 눈은 자신을 마주보는 우시지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얀 날개를 짓밟고 추락한 패왕 위에 올라앉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줄게. 내 것이 된 너의 왕좌에서 말이지. 우시와카쨩.”
오이카와가 처음 본 우시지마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왕에게 어울리는 여유로움을 품고 있어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즐겁게 기다리지.”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우시지마는 상체를 바로 하고 다시 창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 빚은 나중에 이자 쳐서 받을 거야.”
“변덕을 빚이라고 하진 않는다. 오이카와.”
“재수 없는 자식.”
“왕으로서의 품위를 배우는 게 좋겠군.”
우시지마가 다시 웃었다. 그만큼 오이카와의 얼굴이 굳었다. 좀 전과 다르게 웃는 얼굴. 우시지마는 이렇게 웃을 수도 있는 건가라는 생각에 오이카와의 눈이 우시지마의 입술을 좆았다.
창문을 연 우시지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곳에서 뛰어내렸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움직임에 오이카와는 얼굴을 찡그렸다.
“제 정신이야?!”
이와이즈미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오이카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와쨩. 이래봬도 오이카와씨가 왕이거든?”
“그래서, 뭐?”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것 같은 이와이즈미의 살벌한 얼굴에 오이카와는 양 손을 들어 항복을 표했다.
“어떻게 잡았는데 그걸 진짜 놔줘? 미쳤어?”
“오이카와씨가 잡은 게 아니잖아.”
“하?”
솔직히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다. 아니, 사실 오이카와가 말없이 알현실을 나섰을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이와이즈미를 비롯한 최측근 몇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했었는데, 역시 기대를 했던 쪽이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이와이즈미는 거칠게 오이카와를 뿌리쳤다.
“너, 후회 할 거다.”
“왜?”
“시라토리자와의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다시 잡는 건 얼마나 피를 흘려야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버리는 패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대답에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몰라.”
“그런 게 어딨어. 나중에 오이카와씨가 우시와카쨩 잡을 때 이와쨩이 필살기 날려줘야 해.”
“하겠냐! 바보카와!!!!”
버럭 소리를 지른 이와이즈미는 바닥이 울릴 정도로 크게 발소리를 내며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오이카와씨가 왕이라니까.”
이와이즈미가 사라진 방향으로 손을 흔들어 준 오이카와는 조금 전까지 우시지마가 차고 있던, 바닥에서 무의미하게 구르고 있는 족쇄를 집어 들었다.
체온이 사라진 금속의 냉기가 무심히 우시지마의 부재를 알려주었다.
“다음엔 놔주지 않을 거야. 우시와카쨩.”
그것에 가볍게 입 맞춘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사라진 창을 돌아보며 진심으로 웃었다.
“나도 기대하고 있으니까.”
우시와카쨩의 전부를 가질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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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케이크 원하는데.... 왜 뒤가 없지? ㅠㅠ
여기 우시와카기미께선 입 좀 터시는 걸로.
왜 썼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우시지마가 오이카와한테 왕좌에서 범해주겠다고 하는 대사를 치는 게 보고싶어서입니다. 네...
언제나 그렇듯 퇴고는 없습니다.... 오타 죄송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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